영동 공용 창고

 

 

기억나는 것은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 뿐이다.


[……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아. 어떻게 목숨만은 간신히 건졌지만… 이 아이의 미성숙한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데미지를 입었어. 아마 평생 낫지 않을걸. 당연히 당신들이 바랬던 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퇴보해버렸을지도 몰라.]


'하늘색의 빛'은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화가 난 기색이 강하게 담겨있다.


[이런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이 계획에 반대했던거야. 애초에 너무 무모했어. 날짜가 얼마 안남아서 초조한 기분이었던 건 이해하지만, 결국 당신의 아이한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입혔잖아.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거야?]
[……]


이어진 '하늘색의 빛'의 말에도, 그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은, 그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이슬로기아와 스키아드럼은 이미 돌아갔어. 하지만, 그들은 이번 일로 배운 게 있는 모양이야. 아마 당신이 한 일을 응용해서 아이들에게 시험해볼 생각인 것 같던데.]
[…… 그런가.]


간신히, 대답이 나온다. 정말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다.


[그 아이, 오래 살게 하고 싶으면 더이상 무리시키지 않는게 좋을거야. 한번 더 같은 일이 벌어지면, 다음에는 내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테니까.]
[알고 있어. 도와줘서 고맙다. … 그란디네.]


이윽고, '하늘색의 빛'이 사라지고.
나와 그만이 남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와 '하늘색의 빛'이 나눈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내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하려던 일이 망쳐졌다는 것이다.


"랜드, 마이트……"
[… 일어난거냐.]


아팠다.
누운 채로 그의 이름을, 그 한마디만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그만큼 아팠던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아픔조차 참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가… 잘못한… 거지…?"
[……]
"내가, 실수해서… 이렇게 되는 바람에… 엉망이 된… 거잖아…"


그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때의 내가 좀더 강했더라면.
그 '일'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더라면.
조금쯤은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미안… 내가, 이렇게… 약해서… 정말로, 미안…"


[…… 이제 됐다. 더 말하지 않아도 돼.]


나 정도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그의 몸이 움직인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틀린 건 나였다. 사과를 해야하는 건 나야… 내가, 잘못한거다…!]


그의 거대한 머리가 내 앞에 놓여진다.


그는 울고 있었다.
언제나 크고.
언제나 강하고.
언제나 엄하고.


그러면서도 상냥했던 그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욕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어… 내가 그런 바보같은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네 몸이 이렇게 망가지는 일따윈 없었을텐데… ]


아니, 다르다.
그는 어디까지나, 나를 지금보다 강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뿐이다.
그러니까 나쁜 것은 그것을 버텨낼 수 있을만큼 강하지 못했던 자신이다.


그렇게 말을 해줘야 했는데.
울고 있는 그를 보고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랜드마이트는, 내 눈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 미안한데, 다시 한번 말해줄래?"
"이걸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있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이젤 그림어스는 크게 한숨을 토하며,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안경을 벗어 그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올리자, 이젤과 같은 「페어리테일」 소속의 소녀 마도사 라키 올리에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은 한장의 종이. 이곳 마도사 길드 페어리테일이 들어온 의뢰를 이런 「현상금 수배서」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게시판에다 걸어둔 다음, 그 일을 하길 원하는 마도사가 그것을 가져가는 방식을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가져온건데?"
"나는 지금 긴급하게 자금이 필요하고, 지금 길드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런 일을 같이 해줄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었으니까."
"…… 아아, 과연 그런 거구나."


무슨 이야기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 이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두번째 한숨을 토한다.
평소 때였다면 별로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를 받아줬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다.


"저기 말야, 라키. 나 오늘은 일 같은 거 하지 않기로 했는데."
"알고 있어, '그 날'인 거. 하지만 이번 의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이젤이 페어리테일에 들어온지 벌써 7년.
그가 보름에 한번, 한달에 두번 '어떤 꿈'을 꾸고 컨디션이 굉장히 나빠지는 날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길드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라키 역시도 그 '대부분'에 속해있고.


'… 뭐, 그걸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니까 문제없겠지.'


상당히 기묘한 말투를 쓰긴 해도, 라키는 총명하다. 그런 그녀가 무리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 정말로 문제가 없는 거겠지.
일단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보고. 그렇게 생각한 이젤은 그녀에게서 의뢰지를 받아들었다.


"…… <애완동물 수색>, 10만?"


비싸다. 상당히 비싸다.
고작해야 애완동물 수색에 10만이라니. 길드의 신참인 루시 하트필리아가 지금 살고 있는 방의 한달치 집세를 내주고도 3만이 남을 정도다(물론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 뿐이고 실제로 대신 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 나랑 같이 하고, 반으로 나누자."
"그건 좋지만 말야. 이거… 왜 이렇게 비싸?"


게다가 고작 애완동물 찾기에 이런 보수가 붙었는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남아있었던걸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곧바로 풀렸다. 라키가 의뢰서에 적혀있는 문장 중 한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기 때문이다.


<의뢰인 : 코제트 맥시밀리언>


이젤이 알기로, 이곳 매그놀리아에서 맥시밀리언이라는 성을 쓰는 집은 하나 뿐이다.
도시 바깥과 가까운 언덕 위에 저택이 있고, 매그놀리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귀족 가문인 맥시밀리언 남작가.
그들이 유명한 이유를 꼽자면 역시 귀족이라는 점도 있고, 선선대까지가 대단한 무기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점도 있으며, 얼마 전에 벼락출세한 집안인 '콜도바' 가문과 틈만 나면 싸움을 벌여 시내를 시끄럽게 만든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유명한 것은 그 괴이하기 짝이 없는 애완동물 취미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 저런 거 애완동물로 키워도 되는거야? 라고 할까 도시 안에 있으면 안되는 물건이잖아!"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법한 맹수나 마수. 맥시밀리언 가문은 그런 것들을 대대로 애완동물로 길렀다.


요즘 들어서 유명한 것이라면 가장인 남작이 기르는 거대한 바다코끼리 <빅팽>, 장남의 코끼리같은 상아를 가진 공룡 <엘리펀트 사우르스>, 그리고 차녀의 얼룩무늬 고릴라인 <제브라 콩> 정도가 있다. 특히 마지막 녀석은 시내에서 날뛰던 것을 같은 페어리테일 소속의 동료 마도사, '나츠 드래그닐'이 때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목격하고는 희희낙락하며 때려눕히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지만, "애초에 그런 맹수의 목줄을 풀어놓고 지낸 쪽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내려져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결국 그 뒤로 그 집안의 차녀는 나츠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박박 갈게 됐다고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코제트라면, 그 집안 막내지?"
"응. 딸 셋 중에 막내."


부모와 아들 둘과 딸 둘이 전부 '저런' 것들을 키우고 있었으니 막내라고 해서 제대로 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다들 이 의뢰를 피한 거겠지.
보통 애완동물 수색이라면 몰라도, 마수일지 요수일지 모르는 물건을 찾는 일이라면 10만의 보수도 무색하다.


"정확히 어떤 걸 찾아야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그쪽으로 가서 직접 들어야돼. 아무튼… 할 거야?"
"… 하는 수밖에 없잖아. 너 혼자서라도 갈 생각이지?"
"물론. 내 마법이라면 왠만한 맹수라도 상처없이 포박하는데 문제없으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집안 애완동물에 방심은 금물이다. 제브라 콩이 날뛸 때 상대한 나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당히 즐거웠다"="꽤나 애먹었다"고 하니까.
… 결국 언제나 이렇게 된다. 오늘 세번째의 한숨을 쉬며, 이젤은 책과 안경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알았어. 나도 같이 갈게."
"응응, 너라면 그렇게 행동해줄거라고 생각했어."


이젤의 대답에, 라키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제가 의뢰인인 코제트 맥시밀리언입니다."


저택으로 찾아간 두 사람은 잠시 기다린 끝에 의뢰인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7, 8살 쯤 되보이는 작은 소녀. 하지만 그 언동에는 귀족 특유의 기품과 오만함이 담겨있고, 기본적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강하다.


'오래 있고 싶진 않네.'


라키는 그렇게 생각하고, 영업용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페어리테일의 마도사입니다. 의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늦게 오셨네요. 하루만 더 지체되었더라면 저희 가문의 경비병들에게 수색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 그래서였던가. 이 저택에 왔을 때 경비병들이 묘하게 친절했던 이유가.


"뭐, 가능하면 언니의 그 시건방진 고릴라를 때려눕혔다는 「샐러맨더」가 와주길 바랬지만,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 당신들이라도 상관없어요."


꼬맹이 주제에 건방지긴. 라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젤은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하는 샐러맨더, 나츠 드래그닐은 화룡의 힘을 가진 '멸룡마도사'로서 그 전투력은 페어리테일 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본인이 터무니없는 호전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그걸 자제할 생각이 없으니 <애완동물 수색>같은 일을 맡을 리도 없거니와 한다쳐도 그 애완동물을 상처없이 잡아오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는 커녕 이 저택이나 안날려먹으면 다행이지.'


이젤이 그런 일을 생각하는 동안, 라키가 본론을 꺼냈다.


"그럼 곧바로 일 이야기를 시작하죠.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거고 눈에 띄는 특징이라거나 할 게 있나요?"
"장소는 여기서 멀지 않아요. 도시 장벽 바깥에 있는 숲 속이니까. 저번 주에 피크닉을 갔을 때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머리 부분에 분홍 리본과 꽃모양 브로치를 달고 있으니까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이름은 '세실리아'라고 해요. 제일 좋아하는 건 아르마쥬에서 파는 딸기잼하고 마로블랑의 햄이에요."


<숲속이라는데, 괜찮겠어?>
<땅을 밟고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젤의 대답에 라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일을 시작해도 괜찮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그 애완동물은 어떤 동물인가요?"


일단 이 꼬마도 이 집안 사람이고 하니 평범하게 강아지나 고양이일거라곤 기대도 안한다.
그렇게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두 사람이었지만, 소녀의 대답은 그것마저 능가했다.

 


"샌드웜이요."

 


"…… 네?"
"샌드웜의 새끼예요. 빨리 찾아와주세요. 지금도 혼자 무서워서 떨고 있을테니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돈 많은 인간들 머리 속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평범하게 개나 고양이로 하면 안되는거야?"


라키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거세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젤로서도 그 기분을 이해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일은 일이다.


"취향은 자유라고 하니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취향은 자유라고 하지 않아. 방종이라고 하지. 게다가 샌드웜은 마물이고."


본래 샌드웜이란 '갯지렁이'를 뜻하는 단어지만, 일반적으로는 동명의 마물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갑각으로 뒤덮힌 지렁이같은 형태를 하고서 땅속을 돌아다니는 요수. 전부 성장하면 몸길이 30m는 가뿐히 넘긴다고 하고 간혹 50m 이상의 개체도 보인다고 하는, 생태계의 괴물이다.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견고한 껍질로 인한 방어력과 철판도 우습게 꺾어버리는 괴력, 그리고 바위도 씹어삼킬 수 있는 이빨과 소화력 등 위협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코제트는 그런 물건을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건 기르는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잖아? 게다가 듣기론 아직 새끼라고 하던걸."
"새끼라도 길이 1m짜리 지렁이야. 가능하면 보고 싶지도 않다구. 게다가, 거기에다 리본에 브로치? 이름까지 세실리아? 무슨 정신인걸까."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서도 두 사람은 코제트가 '세실리아'를 잃어버렸다는 숲 바로 앞까지 들어왔다. 나올 때는 아침이었지만, 어느덧 점심 시간을 지나고 있었기에 해가 높이 떠있다.


"어때? 찾을 수 있겠어?"
"응, 뭐… 잃어버렸을 때부터 이 숲에 그대로 있다면 찾을 수 있어."
"샌드웜은 원래 한번 둥지를 정하면 그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고 하고… 아직 새끼라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멀리 갈 수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도망쳐봤자 여기에서부터…"


라키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발밑을 가리키고, 그대로 선을 긋듯이 움직여 숲 너머의 산을 향했다.


"… 저기까지 정도."


덧붙여서, 아까 나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탐문해본 결과 최근 이 근처에서 야생동물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빠짐없이 챙겨들었다.
하지만 코제트의 수행원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근처는 왠만큼 훓어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기에 없거나.


"아니면 굉장히 꼭꼭 숨어있거나 둘중 하나겠지."
"그것때문에 내가 온 거기도 하고 말야."


이젤은 끼고있던 장갑을 벗고, 맨손을 바닥에 갖다대어 눈을 감고 마법을 사용했다.


「대지의 고동」


전신의 신경을 손바닥에 집중시키고, 손을 댄 지면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을 느껴 목표물을 찾아낸다. 말그대로 온 신경을 다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을 때 기습당하거나 했다간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져버리겠지만 지금처럼 동료가 곁에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 문제없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난다.


그리고.


"…… 찾았다."
"어디야?"
"여기서 좀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는 바람에 좀 오래 걸렸어.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범위 내라서 찾을 수 있었지만. … 저기."


이젤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숲 너머의 '산'이었다.
그것을 본 라키가 가볍게 혀를 찬다.


"… 정말로 저기였던거야?"
"응. 아마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해.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긴 했지만, 제일 '샌드웜처럼 큰 지중생물이 내는 것 같은 진동'은 저기서 밖에 안났으니까."


설명을 들은 소녀는 침음성을 흘렸다. 저 산은 예전부터 발칸같은 마물들이 날뛰기로 평판이 나쁜 하코베 산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을까? 얼마 전에 마카오 씨가 발칸을 19마리나 퇴치하기도 했고, 그걸 찾으러 간 나츠가 날뛰기도 했었잖아."
"하긴. … 좋아. 그럼 빨리 끝내고 복귀하자."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다.

 

 

 


"여기 맞지?"
"응. 아까 진동을 느꼈던 장소는 이 바로 아래야. 꽤 깊긴 하지만."


매그놀리아 뒷산 중턱.
이곳에서 이젤과 라키는 수색을 시작하기로 했다.
위치는 파악했지만,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다. 가능한 한 상처없이 잡아야 돈도 제대로 줄 것 같으니까.


라키는 매그놀리아에서 나오기 전에 들린 도서관에서 대여해온 책을 꺼냈다. 샌드웜을 비롯한 마물들의 생태가 기록된 서적이다.


"아마 이 근처에 동굴이 있을거야. 크든 작든. 아무리 샌드웜이라고 해도 먹이를 먹을 때는 땅 위로 나와야하고, 그러려면 이미 있는 동굴을 이용하는 게 제일 좋을테니까."


아무리 샌드웜이라고 해도 땅속을 들락거릴 때마다 새로 구덩이를 판다는 것은 귀찮은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동굴을 둥지로 삼거나, 자신이 새로 만든 동굴을 그대로 확장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 라고 라키가 덧붙였다.
라키가 시키는대로 주변을 수색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이 하나가 간신히 기어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한 동굴 하나가 발견되었다. 아니, 이 정도면 동굴이 아니라 구덩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찾긴 찾았는데 동굴 크기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네. 이제 어떻게 할까."


라키가 잡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으려니, 이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가서 잡아올까?"


이젤의 체격은 라키와 비슷한 정도였지만, 그에게는 땅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도 있다.
하지만 라키는 이젤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돼. 네 그건 속도가 별로 안나오잖아? 만약에 '세실리아'가 낌새를 느끼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질거야."
"… 그럼, 마을로 돌아갔다가 그 뭐냐… '세실리아'가 좋아한다는 잼이랑 햄을 사와서 유인한다는 방법은?"


자신이 말한 거지만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키는 그 의견마저도 기각한다.


"그것도 안돼."
"…… 에? 어째서?"
"나 그 꼬마가 말한 '아르마쥬의 잼'이나 '마로블랑의 햄'이라는 거 알거든? 그거 고급품이라 터무니없이 가격 높아."
"어느 정도로?"
"그 잼 한병하고 햄 한토막에 우리 3일치 식비가 사라져."


… 하여튼 돈 많은 것들이란. 이젤과 라키는 한마음 한뜻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것도 관둔다고 치고. 어떻게 잡을 생각이야?"
"아아. 마침 좋은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어. 지금 바로 마른 나뭇가지 좀 모아줄래? 가능한 한 잔뜩."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라키는 이젤에게 지시를 내렸다.
2분 정도 지났을까. 이젤은 라키의 앞에 나뭇가지들을 수북히 쌓아올렸다.


"샌드웜은 기본적으로 야행성이야. 낮에 자고, 밤에 먹이를 찾지. 그러니까 지금쯤이면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시간.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가까이 가면 금방 눈치채버릴테니까 섣불리 접근할 수 없어."
"그럼?"
"당연하잖아.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면, '세실리아' 쪽에서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 말을 끝으로, 라키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그녀는 흡연자가 아니지만(애초에 18살이긴 하지만), 있으면 여러가지로 편리하다는 이유로 갖고 다니고 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돌에 긋고 불을 붙이고, 동굴 입구에 쌓아놓은 나뭇가지에 던져넣었다. 나뭇가지더미는 곧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하며 동굴 안으로 연기를 흘려보냈다.


"아아, 너무해… 훈제로 만들 셈이야?"
"빨리 안나오면 그렇게 될지도. 그치만 샌드웜은 소리랑 냄새에 민감하니까 금방 반응이 올거야. 동굴이 깊다면 시간이 좀 소모되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세실리아'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엄청난 기세로 몸을 움직여, 연기를 뚫고 구덩이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나타난 것은 몸길이 1m에 달하는 갈색 지렁이다. 아직 유생체이기 때문에 갑각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 한복판의 외눈과 그 바로 밑에 달려있는 동그랗게 벌려진 입에, 빈틈없이 돋아나있는 이빨들은 분명 샌드웜의 것이다. 머리 제일 윗부분에는 마물임을 뜻하는 작은 뿔이 나있고.


거기에.
흙과 먼지가 묻어 상당히 더러워지긴 했지만, 머리 부분에 묶여져있는 분홍색 리본과 꽃모양의 브로치는 이번 일의 목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고.


"우드 메이크! 「사냥꾼의 우리」!!"


'세실리아'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라키가 소리치며 마법을 발휘한다.
그녀의 마법 「우드 메이크」는 그 자리에서 나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기로, 공격과 방어 양쪽 모두에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나무줄기를 엮어 '끈'을 만든 다음 표적을 포박하는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기이이이이이익!!]


나무 줄기에 묶여 바닥에 떨어진 '세실리아'는 유리를 긁는듯이 기분나쁜 소리를 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유생체에 불과한 몸으로는 라키가 우드 메이크로 만들어낸 나무줄을 끊을 수 없었고, '세실리아'를 옭아멘 줄은 이윽고 나무 우리로 형태를 바꿨다.


"포획 성공! 이제 가져가기만 하면 돼!"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끝났네."
"그야, 너하고 내가 온 거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만 아니라면 못잡을 리 없지."


지면에 발을 대고 있는 것이나 땅속에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찾아낼 수 있는 이젤과, 상처없이 상대를 포박할 수 있는 라키. 두 사람의 조합은 이런 '생물 포획' 의뢰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이 최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돌아가자, 라고 라키가 말하려는 순간.


─숲속에서 수풀을 헤치고, 커다란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쿵, 쿵, 쿵, 쿵, 쿵─


무거운 발소리. 어딜 어떻게 들어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지면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 그것으로 느껴지는 무게. 인간보다 훨씬 큰 생물이다.
이젤과 라키는 거의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무를 꺾으며 등장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우호호호호호호호홋. 인간! 찾았다!]


이상할 정도로 뾰족한 귀. 정수리 부근에 나있는 외뿔은 평범한 맹수가 아닌 '마물'이라는 증거.
상체의 근육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한 유인원 형태의 수인(獸人).


"「발칸」?! 어째서 이런 곳에…!"
[우호홋. 페어리테일한테는 빚이 좀 있어서. 너희들도 페어리테일 녀석들이지?]


발칸의 말에 라키와 이젤의 표정이 굳었다.


'이 녀석 설마…'
'마카오랑 나츠한테 당한 패거리의 잔당인가?'


그렇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발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전투 준비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호홋, 이렇게 해줄테다!!]


대답과 동시에, 발칸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그 거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도약력.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발칸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강하게 움켜쥔 두 주먹을 내리치며 이젤과 라키 사이에 떨어진다.


─쾅!


"윽!"
"……!"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같은 크레이터를 만들어낸 발칸의 공격.
두 사람은 재빨리 양 옆으로 흩어져 직격만은 피했지만,그럼에도 충격파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먼지구름과 위력으로 인한 바람이 두 사람을 휩쓸었고, 잠시동안이나마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 녀석… 상당히…!'
[우호호홋!!]


그 먼지구름을 헤치며, 발칸은 가까이에 있는 라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라키도 또한 미리 대비를 하고 있어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우드 메이크! 「마음의 거리감」!"


손바닥을 바닥에 갖다대는 순간, 녹색의 마법진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며 빛을 발한다.
그 직후, 바닥을 뚫고 두꺼운 나무로 이루어진 기둥과 벽들이 솟아오르며 발칸을 공격했다.
같은 페어리테일의 마도사, 그레이 풀버스터의 「아이스 메이크」와 마찬가지로 원소를 이용해 자신이 이미지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조형마법. 그렇기 때문에 그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미지할 틈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우홋!]


자신의 코앞에서 나무벽과 기둥이 솟아났는데도, 발칸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아니, 단지 피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벽들과 기둥 사이로 들어가, 마치 숲속에서 나무를 타는 것처럼 이리저리 날뛰어 헤치고 나온다.


"그런, 거짓말?!"


설마 그런 방식으로 돌파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라키가 경악한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샌드웜을 가둬두고 있는 나무 우리까지 들고 있다. 발칸의 공격에, 제때 반응할 수 없다.


맞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라키의 허리를 끌어안은 이젤이, 나무 우리까지 들고서 발칸의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린다.


"꺄앗?!"


갑작스러운 가속에 놀란 라키가 살짝 비명을 지르는 동안, 발칸의 주먹이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있던 장소를 강타한다.
바위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바닥이 내려앉는다.
제대로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젤은 발칸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고 생각하자, 라키와 나무 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세실리아' 챙기고 뒤로 물러나있어줘. 지금부터는 내가 할테니까."
"괜찮겠어? 오늘은…"


라키가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다.
마력도, 신체의 상태도 평상시보다 떨어지는 날. '그 꿈'을 꾼 날은 언제나 이렇다.


"응. 그래서 곤란해. … 저만큼 활발하게 날뛰는 상대라면, 봐주지 못할테니까."
"… 알았어. 조심해."


이젤의 말을 들은 라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우리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


'… 결국 힘쓰게 되네.'


오늘만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이젤은 발칸과 마주보고 선다.


[우홋. 작은 인간. 나랑 싸울 생각? 우홋! 우홋! 바보! 바보! 바아~보오! 약해빠진 인간이!]
"마음대로 말해도 좋지만, 우리들한테도 일이 있거든. 그러니까… 오래는 못 놀아줘."
[우홋, 우홋. 오래? 놀아? 그럴리 없지이. 왜냐하며언~]


이젤의 말에 히죽거리던 발칸이 자세를 낮춘다.
사냥감을 덮치기 전의 맹수처럼, 언제라도 돌진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한방이면 끝이니까아아아아아!]


그 엄청난 다리 힘으로 단숨에 도약하여, 이젤을 향해 뛰어든다.
보통의 기사, 어지간한 마도사라면 어떻게 공격당했는지도 모르고 당할만큼 빠른 공격. 게다가 위력마저도 충분하고 넘칠만큼 강하다.

 


그 주먹이,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때린다.

 


[우홋?!]


없다.
분명 자신의 주먹에 맞아 납작해졌어야할 '작은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발칸은 바닥에 꽂힌 주먹을 뽑아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그런 발칸의 뒤에서, 이젤이 수인을 맺으며 소리친다.


"토둔, 「암석수리검」!"


이젤이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지면의 암석에서 몇개의 파편이 떨어져나온다.
십자수리검의 형태로 깎인 그것들은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며 날아갔고, 그대로 발칸의 등에 부딪혔다.


[우오오오옷?! 아프다아아아아아?!]


그제서야 발칸은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수리검이 꽂힌 등판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이, 이게! 어느 틈에, 내 뒤로?!]


발칸이 돌진하는 순간, 발칸을 훨씬 웃도는 속도로 그를 뛰어넘어 뒤로 착지한 것이지만, 그것을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젤은 침묵을 지키며 전투 자세를 유지했다.


[너, 너! 땅 속성의 마도사구나! 맞지이! 그, 그렇다면!]


발칸은 그대로 위로 뛰어올라, 옆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탄다.


[따,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있으면! 너, 너는 나를 공격 못해! 우호홋!]


… 그래도 아예 바보는 아니었군. 이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겹쳐서 앞으로 내밀었다.


"확실히, 속성은 땅이지만 말야."
[우호홋! 우호홋!]


발칸은 기쁜 듯이 나무 위에서 춤을 추며, 나뭇가지(라고는 해도,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의 창에 가까울 정도로 길고 굵다) 하나를 꺾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던져 공격할 모양이다.


그러나.
이젤의 공격은 그보다 빠르다.


"수둔, 「수백철류포」!"


두 손의 사이에서 생겨난 물이 오른주먹을 휘감는다.
앞으로 나아가며 그 주먹을 발칸에게 내지르자, 주먹을 감싸고 있던 '물덩어리'는 포탄과도 같은 기세로 날아가 나무 위의 발칸을 강타했다.


[우호호호호호오오옥?!]


느닷없이 얼굴에 물포탄을 뒤집어쓴 발칸은 그 고통에 허우적거린다. 위력도 실제 포탄급에 가까웠지만, 무엇보다도 눈과 콧구멍으로 다량의 물이 흘러들어갔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 한참을 퍼덕거리던 발칸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고, 이젤은 그런 발칸에게 추가 공격을 가한다.


손가락과 손가락의 사이.
한손에 네개씩, 오른손과 왼손에 '불이 붙은 작은 구슬'을 끼우고는 고릴라 마물을 향해 던졌다.


"화둔, 「작열연기탄」!"
[우고고고고옷!]


마력의 불을 담은 폭약탄. 그런 것이 8개.
발칸의 몸에 닿자마자 폭발을 일으킨 폭탄은 발칸의 몸에 불을 붙였고, 발칸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속성이 땅이라고 해서, 다룰 수 있는 것도 땅뿐이라는 건 아냐. 보다시피, 물도 불도 쓸 수 있거든."
[우고옷… 이, 이 꼬맹이가아아아!!]


생각지도 못한 공격들에 부상을 입은 발칸이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분노로 인해 근육이 팽창하고, 그에 따라 공격에 실린 힘도 증가한다.


[우고오오오오옷!!]


암석조차 아무 문제없이 깨트려버리는 주먹이, 이젤의 작은 몸을 강타하고.

 


─그것은, 조금 굵은 나무토막으로 변했다.

 


[우홋?!]
"인법, 「바꿔치기술」."


발칸의 등뒤에서 이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릴라 마물은 뒤늦게 몸을 돌리려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젤의 발차기가 그의 뒤통수에 꽂힌다.


[우고오옥!]


강렬한 충격과 함께 균형을 잃어버린 발칸은 앞으로 나동그라졌고, 이젤은 그 반동으로 몸을 띄워 발칸과의 거리를 벌린 후 바닥에 착지했다.


[너, 너! 마도사, 아니다! 마도사는, 이런 거 안쓴다!]
"실례네. 나 마도사 맞아. 정확히 말하면, 마도사인 동시에 '닌자'인 거지만."


몸을 일으키며 삿대질을 하는 발칸을 상대로, 어디까지나 차분하게 대답한다. 물론 경계를 푸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니, 닌자?]
"응. 사정이 있어서 몸이 약하거든, 나. 그래서 나츠나 그레이처럼 몸으로 치고받는 거 잘 못해."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기술들을 익히는데 노력을 투자해왔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동방의 「인술」과 자신의 마법을 섞은 독자적인 전투술. 거기에 화둔술과 수둔술을 비롯한 술법들에, 방금 전 사용했던 폭약탄과 같은 도구들과 눈속임을 이용한 바꿔치기술 등의 수많은 인법까지.
'기술의 숫자'라는 점만 놓고 본다면, 이젤은 페어리테일 멤버 중에서도 최고 레벨로 손꼽힌다.


거기까지 들은 발칸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 인술? 닌자? 뭐,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바로 직후, 바닥에 떨어져있는 흙과 자갈들을 들어올려 이젤에게 던진다.


[주저리, 주저리! 시끄러워! 먹어라아아!]


보통 사람이 같은 일을 한다면 잘해봐야 타박상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찮은 자갈이라도 거기에 발칸의 괴력이 더해지면 사람의 피부 정도는 우습게 뚫어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닌다.


그 자갈의 탄환들은, 세명의 이젤 중 가운데의 이젤을 꿰뚫고 지나간다.
관통당한 '이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둘이나 남아있다.


[우, 우혹?! 느, 늘어났다아?!]


인법 「분신술」.
그 이름 그대로, 여러개의 분신을 만들어내 상대를 현혹시키는 닌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기술이다.
물론 마물인 발칸이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을 리 없고, 그저 갑자기 숫자가 늘어나버린 적에게 당황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눈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두명의 이젤은 발칸을 가운데에 놓고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를 어지럽혔다.


[우, 고옷?! 왼, 아니 오른쪽, 아니아니 뒤, 아니아니아니…!]


혼란의 극에 달한 발칸이 마침내 머리를 싸매쥐고 비명을 지르자, 그 흉판을 발로 걷어차 발칸의 거구를 날려보냈다.


[가아아아아아악?!]


2m를 넘어 3m에 가까운 발칸의 거체가 나동그라지며 구르다가, 뒤쪽에 있는 나무와 부딪히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정지한다.
그 사이에 분신술을 멈춘 이젤의 몸이 다시 하나가 됐고, 발칸의 모습을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기절안했어… 평상시였으면 방금 걸로 기절시켰을텐데.'


역시, 조금 과할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이젤이 각오를 굳히는 사이, 발칸이 몸을 일으켜 맹렬히 포효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약간이나마 가지고 있던 이성이 모두 날아가고, 마물로서의 본성을 드러낸다.
실제적인 능력은 변함없을지 몰라도 기세만은 아까보다 훨씬 흉흉해졌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라키가 살짝 몸을 떨 정도로.


'… 더 오래 끌면 안되겠는데.'
[우호호옥! 죽어라, 인가아아안!!]


발칸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이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발칸을 보며, 이젤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만 그것은 한숨을 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숨'으로, 공격을 하기 위해서다.


입으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몸을 살짝 뒤로 젖히자, 그 순간 그의 전면에 갈색으로 빛나는 원형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너머로 달려오고 있는 발칸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친다.

 


"「지룡의 포효」!!"

 


토해지는 것은, 땅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꺾어버리는 '초진동'의 충격파.
소리와도 같은 속도로 발사되는 그것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발칸이 피할 방법은 없다.


충격파는 용서없이 발칸의 거체를 휘말았고.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


─강렬한 폭발을 터트리며, 산 너머로 날려보냈다.

 

 

 


"언제 봐도 굉장하네, 그거."


싸움이 끝나고 이젤이 호흡을 고르는 동안, 라키가 나무 우리를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용을 죽이는 「멸룡마법」. 사람들은 그것을 익힌 자를, 「드래곤 슬레이어(멸룡마도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페어리테일에는 현재 두 사람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소속되어있는데, 그 중 하나가 화룡의 드래곤 슬레이어 「샐러맨더」 나츠 드래그닐.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지룡의 드래곤 슬레이어, 「록 블레이드」 이젤 그림어스. 컨디션이 나쁜 날이라고 해도 발칸 정도는 문제없구나."
"그렇지도 않아. 생각했던 것보다 애먹었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자, 발칸과의 싸움으로 꽤나 여기저기가 파헤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컨디션이었다면 이렇게 되기 전에 끝낼 수도 있었을텐데.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힘이 있으면 인술같은 거 필요없지 않아?"
"… 그건 아냐. 드래곤 슬레이어로서의 나는 강한 편이 아니거든."


아마 순수하게 멸룡마법만으로 나츠와 겨룬다면 5분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불과 땅의 속성 차이는 없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몸이 약하고 멸룡마법의 출력에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신은 나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젤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메울 다른 게 필요한거야. 그러니까 나츠나 그레이들하고도 함께 싸울 수 있는거고."
"흐응……"


이젤의 말에 라키는 납득을 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뭐 됐어. 예상못했던 헤프닝이 생기긴 했지만, 의뢰도 무사히 완수했고,"
[끼이이이…]


라키가 나무 우리를 흔들자, 그 안에 둥글게 말려있는 '세실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보니까 아까 물어보려다가 만 건데."
"응?"
"왜 갑자기 돈이 필요해졌다는 거야?"


이젤이 알기로, 라키는 딱히 사치를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씀씀이가 헤픈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보수를 받아서 어디에다 쓰려고 하는걸까.


"사고 싶은 물건들이 몇개 있어."
"어떤건데?"
"그건 비밀."


라키는 자신의 입 앞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작게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우선은 위장에 먹이부터 주고. 그리고 머리를 절단할거야. 볼일은 그 다음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경악하겠지만, 라키가 특이한 말투를 구사한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놀랄 일도 아니다. 위장에 먹이를 준다는 소린 식사를 하겠다는 소리고, 머리를 절단하겠다는 건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르겠다는 이야기다.
그 이외에 라키의 '특이한 말버릇' 바리에이션으로는 "수면을 취한다" -> "무방비한 시간을 견디다" 등이 있다.


"… 보통으로 이야기하면 될텐데 왜 그렇게 말을 꼬는거야?"
"버릇이 되서.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이젤. 오늘 점심 식사는 내가 금액을 지불할게."
"네에, 네에. … 나도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고 싶으니까."


결국, 처음 예상과는 달리 '힘을 쓰는 일'이 되버렸지만.
동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젤에게 있어서 기분좋은 일이다.


그때문에, 언제나 라키와 동료들에게 휘둘리고 있기도 하지만.


'… 뭐, 아무래도 상관없을까.'


이런 '일상'이야말로.
랜드마이트를 잃어버린 자신이, 「페어리테일」이라는 동료를 가졌다는 가장 큰 증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젤의 발걸음은, 피곤한 몸과는 달리 매우 가벼웠다.


 

주먹을 쥔다. 내뱉던 숨을 멈추며 땅을 밟는다. 신체의 비틀림을 내달리는 주먹에 싣는다.
팡─!하고 허공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면 숨을 들이키며 내지른 주먹과 발을 원위치.
다시 호흡. 다시 일보. 다시 일권.
쥐어짜듯, 반복한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을 꽁지로 묶고, 벗어둔 상체 위로 기어 다니는 온갖 흉터를 땀으로 씻어내며, 이제 갓 어른이 된듯한 사내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주먹을 뻗었다.

그건 단련을 넘어선 괴롭힘.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학대.

고통이 있을 것이다.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친 육체는 휴식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묵묵히 주먹을 뻗는다.

"윽─?"

그런 사내의 고행을 강제적으로 멈추는 건 혹사당한 몸.
다시 주먹을 찌르려는 도중에 덜컥 멈춰버린 사내는 그대로 다리가 꼬이며 흙바닥을 뒹굴었다.

"아야야...."

그제야 바위 같던 사내의 얼굴에 고통이 떠오른다.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
사내가 그대로 대자로 누운체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하길 잠시, 기분 좋은 피로에 취하며 끝도 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는 와중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또 미라젠한테 혼나겠네."

사내는 넘어지는 와중에 돌에 찍힌 것인지 이마에서 흐르는 핏줄기를 닦으며 걱정이 많은 한 소녀를 생각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넘기며 언제까지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라이이~, 또 어디서 다치고 온 거야?!"
"어.....이래저래?."

거대한 홀 안, 수많은 마도사들이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이곳은 심하게 자유롭고 낙천적인 마도사 길드 페어리 테일.
그곳의 카운터에서 은발의 소녀 미라젠이 얼굴의 일자(一)흉터가 인상적인 사내, 라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똑.바.로.대.답.해─"
"으갹! 수, 수련하다가 실수로.....!"

불성실한 대답에는 응징을, 미라젠은 상처를 누르던 알콜솜을 때며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얼굴이 완전 피범벅이 돼서 놀랬단 말이야. 사람 걱정 좀 시키지 마."
"미안, 미안~"

머리를 긁적이며 여전히 불성실한 태도로 웃는 라이에게 미라젠은 볼을 부풀였다.
정말 이 바보는 걱정하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매번 다쳐서 와서는....!

"으악?!"
"자, 치료 끝."

미라젠은 분노와 심술을 담아 반창고를 탁, 하고 쎄게 붙여주며 일어섰다.
다행히 상처가 다시 터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절묘하게 파고드는 고통에 이마를 감싸는 라이.

"하아, 정말 애도 아니고....."

그런 라이는 뒷전으로 두고 투덜거리며 카운터 일을 보기 시작하는 미라젠의 모습을 보며 라이는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게, 23살이나 먹고 뭐하는 건지....'

다치는 거야 라이 개인 사정도 있고, 어쩌다 보니 그런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단순한 찰과상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을 왜 굳이 길드까지 와서 치료를 받을까?
스스로 대충 처리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라지....'

그건 만고의 진리.
그렇다. 라이 풀맨은 눈앞의 소녀 미라젠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이의 짝사랑. 미라젠은 길드 동료 그 이상으로는 생각 안 한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끄는 데에 다치는 건 매우 뭔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치료할 때의 잠깐의 신체접촉을 위해 사소한 건 버리는 게 남자다.

라이는 쓸모없는 생각을 뿌리치듯 고개를 저으며 응급세트를 정리하고 미라젠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없어?"
"어라, 오늘도 의뢰는 안 나가려고?"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라이에게 미라젠은 '뭐, 자주 그러니까.'라고 생각하며 음식이 담긴 쟁반을 넘겨 줬다.

"그럼 이거 저쪽 테이블에 가져다줘."

라이는 언제나처럼 미라젠이 건네준 쟁반을 들고 떠들썩한 페어리 테일 속에 녹아든다.


본디 사람이 모이는 곳엔 소문도 모이는 법이다.

"라이─! 맥주 세 잔만!"
"라이씨! 여긴 음식 추가요!!"
"예에, 기다려!"

특히나 이곳은 온갖 임무를 처리하는 마도사 길드.
그렇기에 이곳으로 흘러오는 소문은 대부분 신빙성 높고 정확한 편이며 다양하다.

"맞아, 라이 혹시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한바탕 폭풍 같은 서빙이 끝나고 주어진 금쪽 같은 휴식시간.
의자에 축 늘어져 멍하니 쉬고 있던 라이에게 뻐드렁니가 특징적인 한 길드원이 다가와 곁에 앉았다.

"북쪽 거리의 괴물!"
"하아, 괴물?"

라이는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했지만, 뻐드렁니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군대에 있는 내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요새 북쪽 거리에 붉은 눈의 괴물이 나와서 사람구분 하지 않고 습격한다 하더라고.
 아직 죽었다는 사람은 없지만 습격당했다는 사람들은 꽤나 있대."
"흐음, 그런데 저번에 나츠에게 거짓말한걸 생각하면....."

영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정확히는 거짓말이 아니고 헛소문을 알려준 거겠지만 말이다.

"아니, 아니, 이건 확실하다고. 아마 조만간 의뢰판에도 올라올걸?"
"헤에,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뭐, 그냥 그랬다고. 그럼 수고해~"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일어선 뻐드렁니는 지나가며 하나의 말을 흘렀다.

"그러고 보니, 미라젠도 북쪽 거리에 살던가~ 엘프먼도 임무 나가서 당분간 없다지 아마?"
".......?!?!!"

소문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냥 퍼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됐든 소문의 뒷면에 존재하기에 돌고 도는 법.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건지 의심스럽지만, 이번만은 감사하기로 라이는 생각했다.

 

잘게 부서진 별빛과 휘영청 둥근 달빛이 밤하늘을 밝힐 즈음에 인적 끊긴 거리를 홀로 걷는 아낙네가 한 명.

"흐응~♪ 가끔은 혼자 걷는 것도 나쁘지 않네."

살짝 웨이브진 은발을 길게 늘어트리고 앞머리는 한대 모아 묶은 그녀, 미라젠은 언제나처럼 길드에서 마지막으로 나와 문단속을 한 후 집으로 향한다.
늘 함께 있던 남동생 엘프먼이 다른 지역의 마물 퇴치 때문에 집을 비워서 평소와는 달리 홀로 집으로 향하고 있지만, 나름 신선하기에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가벼운 스텝. 기분 좋은 흥얼거림.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 뒤를 밟는 그림자.

"흠~ 흐음음~♬"
"......"

미라젠이 길드에서 나온 순간부터 따라붙은 그림자는 행여 달빛이 자신을 비출까 두려워하며 숨소리를 죽이고 발소리를 묻으며
앞선 소녀의 발자국을 조심히 따라 걷는다.

그 행색을 말하자면 스토커. 달리 말하면 변질자. 그도 아니면 변태.

'아니, 전부 그게 그거인데다 그 전에 어느 것도 아니다만.....'

순간의 흐트러짐에 달빛 아래 잠깐 스쳐 지나간 건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 꽁지. 그리고 눈에 띄는 큰 흉터.
그렇다. 그는 라이. 사랑에 괴로워하던 라이는 마침내 짝사랑하는 소녀를 미행하는 스토커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아니라고!'

무엇인가 느낀 것일까? 라이는 이상한 기척에 돌아보는 미라젠을 보고 놀라 건물의 그림자에 숨었다.
이내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미라젠을 보고 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솔직히 본인이 아무리 부정해도 겉으로 딱 보기엔 영락없는 스토커 질이니 들키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그러니 미라젠이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지켜보고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이는 미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쫒아오긴 했는데 그 소문이 진짜일까.....'

라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괴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은 정보들.

-새로이 나타난 신종 마물이다.
-아니다. 마법 실험의 실패로 탄생한 마법 생물체다.
-그건 온통 검은 몸에 붉은 눈을 가졌으며 피를 빠는 괴물이다.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무조건 혼자 있는 사람만 노리며 건물 안까지 들어가면 더는 쫒지 않는다.
-빛을 싫어하는 편이다.

아직도 영 미심쩍어 하기는 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나선 라이였다.
뭐, 당당히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말하고 미라젠의 옆에서 걸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도 아닌 라이로서는 단지 희망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기에 눈물을 삼키며 스토커 짓에 가까운 미행을 할 뿐이다.
물론 제삼자의 시선, 즉 다른 길드원들의 눈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이 무척이나 친밀해 보이는 건 여담이다.

'아, 도착했나.'

어둠에 싸인 한 건물 앞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미라젠. 이윽고 깜깜한 건물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라이는 그제야 걱정되던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뭐, 역시 뜬소문이었나."

그렇다고 치기에는 소문이 너무 구체적이었지만.
하여튼,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다. 라고, 라이는 생각하며 발끝을 돌려 여기에서 정반대 편에 위치한 남쪽 거리 끝자락의 집을 향했다.

 

깊디깊은 밤, 별도 달도 모두가 잠든 시각. 
정적이 무겁게 깔린 거리에 라이는 자신의 발소리를 남기며 홀로 걷는다.

"닿을 수만 있다면~ 닿을 수만 있다면~♩"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를 되뇌며 느긋한 걸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앞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생활비도 아슬아슬하니 내일은 오래간만에 임무라도 해야겠네.'

미라젠을 도와 카운터 일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원봉사에 가까운 거라 라이가 받는 돈은 없다.
물론, 미라젠이 아르바이트 비라며 몇 번 챙겨주려 했지만 라이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때마다 거절했다.
단순하고도 사소한 이유 때문에.

"어쨌든, 한 달 치 집세도 벌어야 하니 좀 위험하더라도 비싼 의뢰를.....음?"

<First Gear>─.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마음을 먹는 순간 라이의 몸을 심지 삼아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오오라.
몸을 내달리는 익숙한 힘의 분류를 제어하며 어둠을 벗 삼아 뛰쳐나온 살기를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간단히 피하고, 뻗어나온 팔을 양손으로 붙잡아 물 흐르듯 엎어치기 한판.
 
쾅─!
[ka──?!!]

보도블록을 깨부수며 땅바닥에 처박힌 검은 인영. 연이어 라이는 망설임 없이 밟아 뭉개려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면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에 애꿎은 바닥만 더 부수고 말았다.

"거......소문이 사실이었나?."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근육을 긴장시키며 경계하는 검은 인영.
어둠에 물든 것 같은 검은 몸에 이목구비를 뭉개고 눈이 있을법한 위치에 달아둔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빛. 보이는 형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지만,
잠깐 맞대본 감촉은 마수, 혹은 마법실험으로 탄생한 생명체와 비슷했다.

미라젠이 혼자 있을 때 나오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지만 이제서야 나타난 이유가 뭐...어.....대충 예상이 된다.
필시 라이가 혼자가 됐기에 튀어나온 것 일테지.
하지만 저것이 무엇이 되었든, 왜 태어났든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확실한 건 저건 적이다.
라이에게 있어서 저 마수는 적이다.

적은,

"제거한다."
[ka, kaaaaaa!]

분노하며 달려드는 검은 괴물. 라이는 그에 맞서 몸을 움직인다.

오행권(五行拳)-곤허(坤虛)

굳게 주먹을 쥐고서 우직하게 일보. 내달리는 팔은 변화 없이 일직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허공을 향해 힘을 때려 박는다.

쾅─!

그와 동시에 명백히 주먹의 밖에 있던 검은 괴물이 불가시의 공격에 얻어맞으며 달려오던 그대로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kr, krr?]

비틀거리지만 바로 일어서는 괴물. 움푹 파였던 몸은 금방 원상태로 돌아온다. 표정은 없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건 당황한 기색.
어째서 당황하는 것 인지 대충 깨달은 라이는 괴물에게 가볍게 말을 걸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넌 마법이 안 통하는 몸 이랬던가?"

내지른 주먹과 발을 원위치. 호흡을 가다듬으며 일순간 다시 일보. 다시 일권.

쾅──!!

재차 튕겨 나가는 괴물.
팔을 올려 방어를 해보지만, 몸이 날아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마법이 아니야."

라이가 익히고 있는 마법은 효능이 단순하지만 확실한, 단계적으로 사용자의 몸을 강화시켜주는 기어(Gear).
마도사인 부모를 두었지만 워낙에 마법에 대한 재능이 떨어졌던 그는 기어 외의 마법은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마법 하나만으로 기뻐해 주는 부모님이 좋았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들려온 것은 갑작스러운 부모의 사망. 
의뢰 도중 마수에게 죽고 말았다는 소식에 검게 고이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고 강함을 소망.
하지만 도무지 재능이 없어 마법으로는 강해질 수 없는 자신에게 절망.

그렇기에 라이는 자신의 살을 깎고, 뼈를 깎고, 영혼을 깎았다.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룩했다.

[kaaaaaaaaaa!!!!]

짜증, 그리고 분노와 울분. 괴성과 함께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가 라이의 뒤에서 다시 나타나는 괴물.
괴물은 손톱을 세워 있는 힘껏 팔을 휘두르지만 라이는 움직임을 읽고, 피해서, 되받아친다.

오행권(五行拳)-철참(鐵斬)

곧게 핀 수도가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고 지나가면, 괴물의 팔은 그 궤적에 휘말려 잘려나간다.
쓰레기처럼 뒹구는 괴물의 팔. 괴물은 피 대신 묘한 연기가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은 느끼는 듯, 비명을 질렀다.

"단지, '기술'일 뿐이지."


'하아.... 이거야 원...'

소문의 괴물은 다행히 걱정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겨우 1단계인 퍼스트 기어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던 것을 보면 아마 길드내의 다른 어떤 마도사가 와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상황은 좋다고 말 할수 없다. 이유는 라이 자신의 몸 때문.

분명 괴물의 공격은 스치지도 않았건만, 아침에 입었던 이마의 상처가 다시 터져 라이의 얼굴을 피로 물들였다.
차오르는 힘에 비례하여 삐걱대기 시작하는 몸. 마비가 오려는듯 떨리는 팔.
바보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증오에 몸을 품고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렸던 과거, 그때 입었던 부상의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 라이를 괴롭힌다.
단지 1단계임에도 라이의 몸은 3단계, 4단계의 기어를 사용한 것 마냥 망가져 간다.

'그래도 저걸 여기서 놓칠 순 없어.....'

[krrrrrrr....]

잘려나간 어깨를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괴물.
겁을 먹은것인지 라이가 슬며시 다가가면 그만큼 몸을 뒤로 뺐다.

저건 여기에서 처치해야 한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미라젠,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

"그럼, 속전속결이다."

─<Second Gear>!

퍼스트 기어 동안 모인 마력을 방출, 기어를 한 단계 더 올려 육체를 강화한다.
라이의 몸을 감싸는 푸른 오오라가 좀 더 짙어진다.
동시에 온몸의 흉터에서 피가 터져나가고, 멀쩡하던 피부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완성되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쓴 피투성이의 혈인(血人)의 모습.
겨우 2단계에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다니, 라이는 자기 신세 한번 처량하다고 생각하며─

축지(縮地).

─검은 괴물의 앞에 나타난다.
경악하는 괴물. 피투성이가 된 라이의 모습에 조금 자신감을 되찾았던 괴물은 사라졌다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보고 놀라 도망가려 했지만
어느새인가 몰린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자아, 끝이다."

쓸데없는 육체의 기능을 멈춘다. 전신에 끓어 넘치는 힘을 응축하고 응축한다.
주먹을 쥐어 힘을 한데 모으고, 내뱉던 숨마저 멈추어 쓸데없이 남은 힘을 긁어모으고,
일보에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고, 비틀어, 내질러, 폭발시킨다.

오행권(五行拳)-염멸(炎滅).

콰-아앙──!!!

수십 개의 폭탄이 일시에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
라이는 괴물의 육체를 분쇄하고 핵을 박살 낸 뒤 나아가 괴물이 기대고 있던 건물마저 날아가는 걸 보며 끝내 기절한다.

아.....또 미라젠한테 혼나겠네.

 

"라이이이잇!!!!"
"아하하하....."

이곳은 매그놀리아 병원의 한 병실.
전날, 마수인지 마법 생물체인지 모를 것을 잡느라 너무 무리한 라이는 전신-열상, 근육파열, 뼈에 금이라는 종합 삼종 세트에 오른팔은 복합골절까지 되고서 병원에 실려왔고,
예상했던 데로 입원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라젠에게 한창 혼나는 중이다.

"아하하, 가 아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물론 미라젠도 밤중에 건물이 날아가는 걸 보고 달려간 군대의 사람들에게 사건개요는 들었다.
북쪽 거리에 풀려난 폭주한 마법생물체.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그걸 처리한 라이.
비록 정식 의뢰로 들어온 일은 아니었지만, 거리의 안전을 유지했다는 평에 건물 한 체를 완파, 거리를 반파 한 것은 좋게 넘어간 것.
(하지만 페어리테일 사건사고 기록에 남겨졌다는건 사견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는가?
게다가 라이의 거주지는 남쪽 거리 중에서도 외곽. 도대체 왜 정반대 편에 살던 라이가 그 밤중에 북쪽 거리를 지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야, 기어 2단계는 그렇다 치고 염멸은 오버였나~ 아하핫."

움직이지도 못하는 당사자는 타들어 가는 사람 속도 모르고, 자기 다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바보처럼 웃기만 한다.
.......리사나, 이럴 때는 화내도 괜찮겠지?
 
"지금이 웃을 때냐, 앙?!"
"죄, 죄송합니다.!"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미라젠의 옛날 성격에 그제야 반성하는 라이는 버릇처럼 머리를 긁으려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정말 미안해 미라젠."
"......알면 됐어."

라이의 진심 어린 사과에 미라젠은 화를 가라앉히고 침대 옆의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그래도 아직 화가 안 풀렸는지 라이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미라젠을 보며 라이는 지레짐작으로 생각했다. 아마 거기에 화내고 있는 거겠지.

"정말 미안...."
"알면 됐대도."
"건물 무너트린 거...."

이 녀석, 뭐라는 거야?
미라젠은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발끈했다.

"그게 아니야 바보!."
"어, 아니야?"

왜 그러지? 건물 무너트린 거 때문이 아닌가? 아, 하긴 이건 마스터가 한숨을 쉬는 부분이던가.
그럼 그 외에 화낼 게 있던가?

"아야, 아야."
"정말이지, 이 멍청이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 때리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바보!"

분노에 새빨개진 얼굴로 라이의 이마를 탁탁 치는 미라젠과 움직이지도 못해 막지 못하는 라이.

이 역시, 어느 한 페어리 테일 소속 마도사의 사소한 이야기 일 뿐이다.

페어리테일 본부는 언제나 시끄럽다.

수많은 마도사들이 사고를 치고 축제를 즐기며 의뢰를 받아들이고 또 생활하는 곳이니 당연히 시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시끄러운 소란 중심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명은 페어리테일 12년차이자 길드내 최고의 애주가. 그리고 카드마법이 주특기인 카나 알베로나, 다른 한명은 4년전 미스트건이 주워온 4년차의 길드원이자 안경이 챠밍포인트라 자부하는 어딘가 조금 어두운 청년인 아인 아니무스.

두사람은 지금 술이 가득차다 못해 넘치고 있는 오크 술통 두개를 자신들 앞에 두고서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오늘만큼은 반드시 이겨주겠어!"

"헹, 오늘도 나에게 돈을 바치려고 작정했구나. 술마시기 승부로 나랑 돈내기를 하다니-"

카나는 자신에게 승부를 건 아인을 보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페어리 테일 내에서 주량만큼은 확실히 S급이라 칭해지는 카나인 만큼 그 표정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카나에게 1만"

"카나에게 5만!"

"뭐야 아인에겐 없는거야?"

"없는건 아닌데 두명정도 뿐이야"

"배율한번 극악하네"

"솔직히 누가 이길거라 생각하겠어. 저 주신酒神 카나에게"

"하기사..."

"거기 외야 조용히해!"

아인은 흥분했는지 삿대질을 하며 돈을 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외쳤다. 외야의 상황은 이미 아인의 패배를 점찍은 상황. 당연하게도 아인으로선 기분 좋을리 없었다.

"이번엔 반드시 이겨준다. 지금까지 잃은 돈 모조리 따주마"

"과연 그게 가능할까나~"

카나의 여유로운 표정에 아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카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나에게 부담을 주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내 인상을 풀며 미라젠을 향해 말했다.

"신호 해줘."

"그럼... 준비, 시작!"

미라젠의 외침과 함께 아인과 카나 두사람은 오크통나무를 잡고 그대로 입안으로 술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신다란 느낌이 아닌 퍼붓는다- 그것이 두사람이 술을 마시는 방식이었다.

다른 애주가가 이 광경을 본다면 당장에 술통에 빠뜨려 죽일놈이라고 외쳤겠지만 지금 두사람에겐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술은 빠르게 비어갔고 3분이 지나기도 전에 술통 안에 있던 술의 반이 두사람의 위장으로 사라졌다. 두사람 페이스를 생각해볼때 앞으로 2분 정도 있으면 여남은 반정도의 술도 사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 페이스대로 갈까... 아니 좀더 올리자'

안그래도 엄청난 술을 들이키고 있던 아인은 카나에게 이기기 위해 한층더 페이스를 올리며 술을 들이키는 양을 늘렸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며 카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자신이 승리했다는 확신에 찬 눈이었다.

아인이 그것을 깨달은것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직후였다.

"쿨러!"

술통으로 역류하는 술, 카나는 어느샌가 술통을 거의 직각으로까지 세우며 통안에 여남은 술을 완전히 마셨다.

퉁 퉁 퉁-

카나가 탁상위에 술통을 놓자 술통에서는 비었음을 증명하는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반면 같이 놓은 아인의 술통에는 아까 역류한 분의 술에 의해서 둔탁해진 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보- 아무리 마시는 양이 많아도 넘어가는 양은 한정되어 있다고! 자, 약속한 대로 돈을 내놔!"

"큭!"

카나의 말에 아인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지갑의 돈을 넘겼다. 아니 넘기려 했다.

풀썩-

지갑의 돈을 꺼내려는 순간 풀썩 주저 앉은 아인, 어느샌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아인은 몇번의 딸꾹질 후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술에 취한건가?"

"설마, 아인 녀석도 카나만큼은 아니지만 술 센편이잖아"

"아냐. 아까 들이킨 양을 생각해보라고. 아무리 술이 센 녀석이지만 그만한 양을 한번에 마셨다면..."

"확실히.."

"게다가 이번에 준비한 술 꽤 독한거잖아."

"뭐야... 기절해버린거야?"

카나는 알콜로 인해 약간 붉어진 얼굴로 아인 옆에 주저 앉아 그의 뺨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아인... 아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아인의 눈 앞에 보인 것은 울티아의 모습이었다. 자신보다 연상이자 실험의 실험체, 그리고 동시에 실험의 책임자인 울티아는 싸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험 시간이다. 아인-"

"벌써 시간이 된거야?"

"얼른 가라, 그 빌어먹을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예전과는 다른 싸늘함이 가득한 목소리. 탈출하고 다시 잡혀온 울티아는 예전과 달리 상냥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울티아에게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아인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쪽으로 향했다.

더 늦었다가는 또 어떤 명목으로 괴롭힐지 몰랐던 탓이었다.

실험실에 도착하자 보이는것은 새하얀 백의를 걸친 마법사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 개발국의 책임자라고도 할 수 있는 브레인은 이 자리에있는 그 누구보다도 흉흉한 기운을 발하며 뭔가를 실험하고 있었다.

어차피 브레인에게 실험당하느니 다른 마법사에게 실험받는게 몇배 났기때문에 아인은 다른 마법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짜리몽땅한 체형에 안경을 쓴, 대머리인 마법사가 아인을 불렀다.

"아인, 왔나?"

"댁이 날 찾은거야?"

"뭐 그렇지. 브레인 녀석은 지금 새로운 장난감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 한동안은 내가 널 담당하게 될거다."

"장난감인가... 알고는 있지만 역시 직접 들으면 기분이 나쁘네"

"나쁘다면 어쩔 거지? 반항이라도 할텐가?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알고 있어. 그러니까 반항하지 못하는거잖아."

아인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대머리 마법사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법개발국에 있는 '실험체' 전원에게는 마법개발국에서 만들어낸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개발국 마법사의 신호에 따라 착용자의 마력을 헤집어 고통을 주고 경우에 따라선 마력폭발을 일으켜 실험체를 완전히 말소시키는. 그러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 실험체로 있는 존재들은 아무리 자신보다 약한 존재가 있더라도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 없었다.

"뭐 오늘 실험을 별거 아니고 말이지..."

석문으로 닫혀있는 방에 도착한 마법사는 석문을 열고 방안으로 아인을 들여보냈다. 안에는 빽빽하다 못해 벽의 원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득한 마법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중 복합 마법진으로 만들어낸 중력속에서 너의 '영역'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가에 대한 실험이란다."

"살아남을 수 는 있으려나..."

"걱정마라 죽을 일은 없을테니. 뭐니뭐니해도 너희는 귀중한 실험체니까 말이야."

아인이 방 한 가운데 서는 것을 확인한 대머리 마법사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닫히자 아인은 자신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메인-"

'영역'을 구축한 아인은 영역속에서 중력을 상쇄하기 위한 갖은 방법을 찾았다. 별개의 공간을 구축해 중력 차단을 시도해 보거나 아니면 영역의 속성을 역중력으로 해 중력을 상쇄시키거나 그것도 아니면 방벽을 만들어 중력의 영향을 줄이거나.

하지만 어느 방법을 쓰더라도 아인에게 가해지는 중력은 조금도 줄어들 기색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늘고 있는듯 했다. 결국 구축해둔 영역을 모조리 소모하고만 아인은 비대해진 중력에 눌려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자신을 이 방에 가둔 대머리 마법사에 대한 욕을 한껏 내뱉으며.

 

"큭..."

이제는 기억하기도 싫은 옛날일을 떠올린 아인은 고개를 저으며 지끈 거리는 머리를 털었다. 조금 정신을 차린듯 상체를 일으킨 아인이 본것은 다름아닌 차가운 물 한잔을 든채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미라젠의 모습이었다.

"아인, 일어났어?"

"미라젠... 내기는?"

"네가 졌어. 돈을 지불하려다가 취해서 기절해버린 바람에 카나가 직접 돈을 꺼내갔고."

"한푼도 안남았겠군."

"아니, 하루 밥값정도는 남겨두겠다는데?"

미라젠의 말에 아인은 손에 있는 자신의 지갑을 바라보았다. 지갑에 남아 있는 돈은 1000J 나츠같이 특별식이 아닌 일반인 하루식사 금액의 평균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그래도 전부 가져가는것보단 났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미라젠에게서 차가운 물을 받아 든 아인은 아까와 같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움 때문인지 머리는 지끈거렸지만 다행이도 정신은 확실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크아.. 울린다."

"그 독한 술을 통째로 마시니까 그렇지."

"카나는 괜찮았잖아."

"걘 예외라고-"

 

미라젠의 말에 아인은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의뢰 게시판을 향해 걸어갔다. 카나와의 내기에서 돈을 왕창 잃어버렸기에 그것을 벌충하기 위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어디보자... 마수퇴치, 도적퇴치... 변변찮은 일들 뿐이네."

대개 5만에서 10만J정도의 어딘가 아쉬운 금액. 아인은 15만 이상의 제법 돈이 되는 의뢰를 찾기 위해 천천히 게시판을 살폈다.

잠시 후, 아인은 게시판 구석에 있는 30만J에 달하는 금액이 걸린 의뢰를 볼 수 있었다.

"어디어디... 괴도 퇴치인가?"

"아, 그 의뢰? 남쪽 마을에 살고 있는 부호가 한 의뢰인데 자기집 가보를 노리고 있는 괴도로 부터 가보를 지켜달라는 의뢰긴 한데... 그 부호 좀 질이 안좋은것 같더라고."

"뭐, 그러니까 이정도로 의뢰비를 건거겠지. 이거 가져간다."

아인은 괴도 퇴치라 적힌 의뢰용지를 떼내며 길드 밖으로 나섰다.

 

"어서오게나. 마법사 제군."

아인이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자 아인과 같은 의뢰를 받은 타 길드 마법사들이 눈에 띄었다. 아인이 마지막에 도착한 것인지 아인이 도착하자 마자 저택의 주인으로 생각되는 중년 남성이 단상에 올라가 말을 시작했다.

"내가 의뢰자인 리트 배너일세. 최근 30면상이라는 괴도가 각지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이번에 그가 내 집의 가보를 훔치겠다고 예고장을 보냈네. 솔직히 말해 무지 불쾌한 일이지. 한낮 괴도가 유서 깊은 우리가문의 가보를 훔치겠다니 말이지."

'유서 깊디는 이제 고작 3대째인 벼락부자가'

부호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은 거의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사전에 정보를 수집한 마법사들은 부호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유서깊으니 뭐니 자랑을 하고 있으니 마법사들로서는 아니꼬울수밖에 없었다.

돈을 받아야하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고로 그 괴도를 잡거나 퇴치해주시기 바랍니다. 체포에 성공한다면 보수는 기존에 제시한 20만J의 4배인 80만J를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대박이다!'

이런 소규모 의뢰에서 100만J면 상당히 대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토벌 의뢰급의 금액까진 아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드는 노력에 비하면 대박이란건 틀림이 없었다.

"내가 잡는다!"

"아니, 내가 잡겠어!"

갑자기 높아진 보수에 의욕이 가득한 마법사들, 하지만 딱 한명 아인 만큼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듯 하품을 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돈은 많은게 좋다지만 귀찮은것은 싫어하는 아인 성향상 추가급이 높다고 해도 잔업이나 귀찮은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쓸데없이 기운좋은 마법사들이 바깥을 지원해 나서고 의욕없는 아인은 그냥 안쪽을 지키는, 사실상 도달하지 못할거라 생각되는 가보 옆을 지원했다. 나름 실력있는 마법사들이 저렇게 의욕을 높이는 이상 괴도란 녀석도 금방 잡힐것 같았다.

"뭐 나로선 공으로 돈버는 셈이니 상관은 없지만."

하품까지 해가며 가보 옆에서 졸고있던 아인은 문 너머로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한두명의 인기척이라면 경계할 필요는 없었지만 10명에 가까운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아인은 수상함을 느꼈다.

"왜 그런가 자네"

졸고있던 아인이 느닷없이 일어나자 함께 가보의 옆을 지키고 있던 부호 리트는 놀란 표정으로 아인을 바라보았다.

아인은 리트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은채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잠깐, 말좀 해보게. 왜 계속 문을 바라보고 있는건가!"

"아무래도 밖에 녀석들 전부 당한건가?"

"무슨-!"

비싼돈을 주고 고용한 이들이 당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리트는 그것에 대해 묻기 위해 아인을 봤으나 아인은 리트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곧장 몇개의 창을 형성해 문쪽을 향해 던졌다.

쾅!

폭발음에 가까운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지며 수개의 인영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리트는 가보옆에 붙어서 주위를 살폈고 아인은 귀찮은듯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기세만 좋았던건가... 아니면 괴도의 실력이 좋았던건가. 어느쪽이든 귀찮기 짝이 없군"

"자, 배너가의 가보를 내 놓으실까?"

"순순히 내놓는다면 아픈꼴만은 면할거다."

"네... 네녀석 괴도 30면상. 길드의 마법사들이 무섭지도 않으냐!"

"그런 어설픈 놈들따윌 겁낼거라 생각하나. 이 30면상님이."

자신만만한 괴도 30면상을 보며 아인은 귀찮은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어설픈놈들인것 같네. 입만 산 녀석도 못잡는걸 보면"

"네 녀석은 누구지?"

아인의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흑의를 걸친 괴도 30면상중 한명이 아인을 향해 물었다. 아인은 오른쪽 어께에 있는 길드의 문양을 보여주며 말했다.

"페어리 테일의 마법사 아인 아니무스. 귀찮은게 싫은 평범한 마법사야"

"그렇게 귀찮은게 싫다면 편하게 해주지!"

30면상의 외침과 함께 마법구를 든 흑의인 셋이 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핏 보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아인은 너무나도 태평 스럽게 서 있었다. 그리고 세사람의 공격이 닿으려는 순간-

아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아인을 공격하던 셋은 창문 밖으로 날려져버렸다.

"뭐.. 뭐지 방금?"

어느샌가 사라진 아인, 그리고 무언가에 당해 날려진 흑의인들. 괴도 30면상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해 불가능의 상황에 당황하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 공격에 맞아 날려진것 뿐."

"아닛!"

갑작스럽게 코 앞에 나타난 아인의 얼굴을 보며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좀 과하다 싶은 반응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놀랄만도 했다. 사라졌다 생각한 인물이 어느샌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왠지 타격감이 별로던데... 저거 사람 아니지?"

"네가 알 필요는 없다!"

30면상의 외침에 여남은 흑의인들이 아인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여섯, 아까의 두배정도 되는 인원이었지만 아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방씩이면 충분하니까."

스팟-

"뭣?"

퍼벅퍽퍽퍽-

순식간에 사라진 아인, 그리고 그보다 조금 늦게 들려오는 연속적인 타격음. 그리고 타격음과 동시에 날려져 벽에 부딪히거나 밖으로 날려진 흑의인들.

그 가운데에는 아까전에 사라졌을 아인의 모습이 떡하니 서 있었다.

"설마 이런녀석들에게 당한건가... 도대체 얼마나 약한 녀석들이 온거야?"

아인은 정말로 한방씩에 뻗은 흑의인 들을 보며 어이 없어했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기에 정말 한방에 뻗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렇게 약한 녀석들에게 당했으니 바깥 녀석들의 수준도 알만했었다.

"잠만 자고 있길래 약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뭐... 약하지는 않아. 남들 만큼 할 뿐"

아인은 그렇게 말하며 30면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럼 남은건 너 뿐인가. 순순히 잡혀주지 않을래 귀찮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 혼자라고."

"뭐?"

아인의 반문과 동시에 30면상의 등 뒤에서 십수명, 아니 수십명에 달하는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아무도 없었건만 갑작스럽게 수십명이 생겨난 것이었다.

"어떻게 된거지? 전이는 아닌것 같고..."

"이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 네놈의 강함따윈 소용 없다!"

깔보는 말투에 아인은 살짝 짜증이 난 표정을 지으며 30면상을 향해 마력으로 구현한 창을 날렸다. 불시 기습이었던 데다가 속도도 상당한지라 어렵지 않게 30면상의 어께를 꿰뚫었다.

하지만 아인은 30면상에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고 인상를 찌푸렸다.

"이 느낌은... 아까 날린 놈들과 같아?"

펑-

풍선이 터지는듯한 가벼운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인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린 흑의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슷한 소리와 함께 아인의 창에 맞은 30면상이 사라져버렸다.

"분신인가..."

[그렇다! 나의 분신 마법인 서틴- 언제나 나의 실력과 동일한 30명의 분신을 만들 수 있고 또 그 분신중 하나라도 남으면 마력이 남아나는 한 얼마든지 불어날 수 있지. 나의 서틴 앞에 적은 없다!]

분신 속에 모습을 숨겼는지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분신을 통해 말한것인지 아니면 마법구를 통해 말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작 그정도 가지고 무적이긴. 어차피 분신이야. 본체만 찾으면 금방 처리 가능하다고."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1:30인 이 상황에서?]

30면상의 비웃음에 아인은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했다.

"찾을 생각따윈 없어. 찾을 필요도 없고."

[허세를 부리다니..]

"허세가 아닌데 말이지..."

[죽엇!]

아인을 향해 쏟아지는 분신들. 일견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아인은 여유롭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인을 향해 공격하던 분신들은 뭔가에 부딪힌듯 튕겨 나갔다.

[뭣!]

"사실 수가 얼마가 되던 그냥 다 날려버리면 되니까 말이지. 너정도 상대라면 그게 가능하니까-"

어느새 생겨난 무수한 창들. 전면 만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그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그 창들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쏟아지는 유성. 슈팅스타-"

아인의 말과 함께 흉흉하기짝이 없는 수백발의 창이 사방팔방으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자, 가보도 지켰고 괴도 30면상도 잡았습니다. 의뢰 완료입니다."

"어버... 어버버버..."

"너무 기뻐서 말이 안나오시나 보네요"

"너무 화나서다!!"

남쪽마을의 부호 리트 배너는 아인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괴도도 잡고 가보도 지키긴 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집을 완전히 붕괴시켜버렸으니까 말이다.

아인이 괴도를 잡기 위해 사용한 슈팅스타는 괴도의 분신을 모조리 없에버리는 것으로 모자라 집 전체에 구멍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집 전체에 생겨난 구멍에 의해 집은 무너져 내렸고 새로 구축한 영역으로 보호한 가보와 부호만이 무사했다.

집이 무너져 내린 여파로 1층에 있던 기절한 마법사들과 슈팅스타에 직격당한 괴도 30면상은 중상을 면치 못했는데 사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해야할 수준이었다.

"에이, 페어리테일에 의뢰했다는건 각오했다는 거잖습니까."

"뭘?"

"집이 무너지는 것 정도는 사실 이정도만해도 페어리테일에선 얌전한 편이고"

사실 전혀 얌전한 편은 아니지만 페어리테일의 상위랭킹의 실력자들이 벌이는 일들 치고는 상당히 얌전한편이었다.

나츠의 경우 마을 반파에, 엘자의 경우 마을 대파, 길다트의 경우 전용 도로를 만들어야만 했고 다른 멤버들도 집 완파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의 사고를 쳐댔으니 이건 약과라고 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런고로 의뢰비 부탁드립니다. 100만J."

"남의 집을 다 박살 내고선 의뢰비 얘기가 나오냐!!"

부호의 외침에 아인은 곤란한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 일이 평의회에 보고되어 페어리테일의 사건사고 기록에 한줄이 더 추가되게 만들었지만 이것은 사소한 일-

이것은 페어리 테일의 소속된 한 마도사의 정말 사소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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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 테일에 이렇다할 SS가 없다는 한탄하에 뜬금없이 세사람이 뭉쳐서 쓰기 시작하는 릴레이입니다.

저 말고 나머지 두 사람의 정체는... 뒤를 기다려 주시길.

이 이야기는 페어리 테일에 소속된 별거있는 마법사들의 별거 없는 사소한 이야기를 다룬 글입니다.

"큭...!"

현재나이 25세, 아니 이곳에 오고 벌써 2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으니 사실상 27세의 나이로 본의 아니게 이세계에서 용사의 동료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마왕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내가, 정확히는 용사인 내 후배가 이 세계로 소환된 원인인인 마왕. 중2병 시절 소설이나 만화로 봤던 그런 위압감있게 생긴 마왕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의 몸에서 발해지는 강함은 소설이나 만화에서 봐왔던것 이상이었다.

특히나 그 움직임에서 보이는 관록은 어렸을적부터 여러가지를 단련해온 나로서도 놀라울 정도였다.

"선배! 괜찮아요!"

용사의 검 엘류시온을 휘두르며 마왕의 맹공을 받아낸 후배를 보며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터무니 없는 강함- 용사보정을 받고 있는 후배를 저정도로 몰아치다니... 지금 후배의 강함은 나조차도 뛰어넘고 있건만 그런 후배를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마력으로는 대등하고 검의 기량은 후배쪽이 더 강했지만 마왕은 오랜 전투경험과 다른 기량, 그리고 용사보다 다 강력한 신체능력으로 전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명만 더 있었으면... 아니 도리어 방해일려나."

용사일행이라고 해봐야 두사람. 전위이자 권사인 나와 전위와 후위를 모두 커버하는 버그캐 용사인 후배 두사람 뿐. 솔직히 어설프게 강한 사람이 있어봤자 나와 후배를 쫓아오지 못하는데다가 후배가 용사로 각성하고 나서는 후배가 다 알아서 해결이 가능했으니 다른 멤버 충원의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한 두사람 정도는 충원할걸 그랬군. 이정도로 강할 줄 알았으면-"

가전의 기공을 발하자 전신에 자색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기공이 전신에 충만해지자 나는 재빨리 혈류를 제어해 초음속의 영역까지 가속된 펀치를 날렸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의 1단, 팔꿈치부터 손목까지의 2단, 손목부터 타격점까지의 3단 가속을 거친 나의 주먹은 공기를 찢으며 마왕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마침 마왕은 후배를 향해 공격을 날리고 있는 상황, 피할 수 없는 체크메이트적 상황이었다. 상대가 마왕만아니었다면-

파캉

요란한 유리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막이 무너져 내렸다. 마왕의 방어결계. 어느새 친 것일까? 물론 기공이 한껏 담긴 초음속의 권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속도로 인해 위력을 얻는 권격은 한번 속도가 줄어들면 그 위력은 현저히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위력이 줄어든 권격은 마왕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위력이 죽은 것을 깨달은 나는 재빨리 주먹을 회수하며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결계를 치지 못할 근거리에서의 난타. 지금까지 온갖 공격을 실패한 나의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은 꽤나 주효했는지 마왕은 나에게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물리며 나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후배는 재빨리 마법으로 거리를 벌리려던 마왕을 방해했고 그 도움에 힘입어 나는 손쉽게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리를 확보한 순간 소나기와 같이 쏟아지는 맹격-

뼈와 살과 근육을 뭉개 하나로 뭉쳐버릴듯한 권격의 노도 속에서 마왕은 방패 대용으로 쓰고있던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보통 칼이었다면 아마 단번에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나 역시 마왕이 사용하는 칼이라 그런지 바위조차 단번에 박살낼 권격 속에서도 상처하나 없었다.

"브레이크-!"

단번에 칼에 담긴 마력을 해방한 마왕은 엄청난 압력으로 나를 날려버리며 그대로 마법을 날렸다. 계통은 화염계- 물론 화염이 마왕으로선 가장 펼치기 쉽고 위력도 나오기 때문에 한 선택이겠지만 나로서는 덕분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빙결계나 전격계면 대처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칼날 형태의 기를 팔에 두른 나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화염을 베어버렸다.

"반칙이군 그 힘은, 어떤의미론 용사보다도 반칙이야"

"그게 마왕이 할 말이냐!"

마왕의 말에 재빨리 파고드는 난 발차기로 마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마왕은 그것을 피하거나 막는 대신 갑주를 일그러뜨리고 있는 내 손을 잡은 후 막대한 전격을 퍼부었다.

"끄아아악!!"

"선배!"

갑작스런 전격에 혼미해 지는 정신, 하지만 가까스로 한가닥의 이성을 붙잡은 나는 기공을 한층 더 끌어올리며 아직 자유로운 왼손으로 마왕의 머리를 강타했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세번의 공격이 마왕의 머리를 강타했다. 물론 마왕의 방어력이 엄청난 만큼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머리에 상당한 충격이 가해진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우랴야야야야야야야!!!"

전격으로 근육이 수축되고 신경전달이 잘 되지 않아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나는 주먹을 멈추지 않고 마왕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사이 마왕은 방벽을 몸에 두르듯 전개하는 방식도, 풍압결계로 나를 날려버리는 방법도, 폭발을 일으켜 나를 날려버리는 방법도 사용해 봤지만 나는 그런 방법들을 단순무식하게 버티며 오로지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큭... 정말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군"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럴만도한게 내 주먹은 마왕도 맞으면 아픈 주먹이다. 그런걸 지근거리에서 몇십발씩 맞고 있는데 타격이 없을리 없었다. 그러나 이대론 타격을 줄 수 있을지언정 결정타는 되지 못했다.

물론 나혼자만이라면 말이다.

"후배야! 날려버려라!"

"하아아!"

순간 마왕성 어전을 뒤덮는 용사의 검 엘류시온의 빛, 그 빛은 단순한 압력만으로 어전을 박살내며 하늘로 치솟았다. 역대 어느용사도 발하지 못한 찬란한 빛- 아마 다른 용사가 이만한 빛을 발하려면 이 세계의 인류 절반이 사멸해야 하리라.

"크왓!"

엘류시온의 빛에 재빨리 마왕에게서 벗어난 나는 후배가 휘두른 엘류시온이 만들어낸 광경을 보며 터무니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들이 싸우고 있던 어전이 완전히 박살나고 성밖에 있던 탑들도 어전 높이를 기준으로 완전히 잘려나갔다.

만약 후배가 엘류시온을 제어하지 않았다면 마왕성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을 것이라-

"몇번을 생각하지만, 그 검 위력 터무니 없어. 부스트 한번에 그정도 위력이라니"

"하아, 하아. 다른 용사때는 이정도까진 아니었다고 하던데요"

"네가 특별한거야? 아니면 다른 용사들이 부실한거야?"

나는 그렇게 솔직한 감상을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 성검 엘류시온이 용사 이외에는 반응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만한 위력까진 아니더라도 대포만한 위력을 마구 쏴대는 저 검은 확실히 위험한 물건이니까 말이다.

"이제 이걸로 돌아가게 되는 걸려나."

"마왕을 쓰러뜨렸으니까. 우리 할 일은 다 한거죠"

본래 소환되자마자 무구를 얻고 사명을 이행해야할 용사인 후배였으나 근처에 있던 나까지 말려들면서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져 1년동안 해메게 되었다. 덕분에 강해질 수 있긴 했지만서도...

"역시 고생이 심했지. 말은 어째어째 통했지만 그렇다고 고생이 적어지는건 아니니 말이야."

"그래도 어떤의미로 보자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하기사 이런 경험도 쉽지 않... 위험해!"

재빨리 기공을 발하며 땅을 박찼다.

후배를 구한 나는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화끈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타는듯한 고통속에서 쉼호흡으로 고통을 줄인 후 고개를 들어올리자 칠흑빛을 발하고 있는 검을 들고 마화(魔火)를 피우고 있는 마왕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아까의 공격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몸 여기저기서 보랏빛이 감도는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까는 정말 죽을뻔했다."

"그걸 버틸 수 있었을리가!"

"확실히 버틸 수 없었을 거야 이 칼이 없었다면 말이지."

나의 경악에 마왕은 칠흑빛을 발하는 검을 내밀며 말했다. 마왕이 내민 검은 얼마지나지 않아 마왕의 마력을 버틸 수 없었는지 산산조각 나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마계의 이름난 장인들로 만들어낸 검이다만 역시 전설의 검인 엘류시온의 일격을 버티는 것이 한계였군."

"그것만으로도 터무니 없다 생각하지만. 큭!"

"선배!"

등에 감각이 없었지만 축축들러붙는 느낌이 느껴졌다. 후배의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면 보나마나 중상. 아니 감각이 사라진 상황이라면 다른 이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를 상처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기공이 줄어드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봐선 심각한 출혈. 치사수준까진 앞으로 3분... 아니 1분 전후.

"후배야..."

"선배 빨리 치유를!"

"필살기 준비해 둬라- 이번엔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걸로."

"잠깐 선배 무엇을 빨리 치료부터!"

나는 후배의 말을 무시한채 땅을 박찼다. 출혈이 심해 '혈류제어'를 이용한 가속도 배가는 불가능 했지만 여전히 상식을 넘어선 속도로 마왕의 코 앞까지 돌진했다.

피가 흩뿌려지며 폐허와 후배의 몸에 그 붉음을 물들였다. 마왕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대단하다는 표정과 함께 찬사를 보냈다.

"대단하군 괴물. 그런 상태로도 움직일 수 있다니."

"나도 놀라워 마왕, 설마 막았다곤해도 그 공격을 맞고 곧장 그만한 공격을 날릴줄은"

"빨리 치료받는게 좋지 않아? 그정도 출혈이면 곧 죽는다고"

"후배녀석이 나를 치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빨라도 수십초. 그 시간이면 네 녀석은 내 후배한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잖아. 안그래?"

"확실히- 그러니까 넌 그몸으로 날 상대한다는 무리수를 펼치는거고."

"서로 잘 알고 있잖아. 친구-"

"그래, 친구"

피차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에 친구였던. 하지만 알아버렸기에 친구라 부르지 못했던 두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다시한번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기 없기다."

"물론-"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진각을 밟았다. 몸에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도, 피에 기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도 진각의 위력은 바닥에 금을 새기고 본성을 뒤흔들만큼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파천황破天荒!"

"데몬즈 플레어"

힘을 남기지 않고 몸 구석구석에 잔류하는 기공을 남기지 않고 끌어올렸다. 나중따윈 필요없었다. 지금 필요한것은 그저 모든 힘을 한점에 모아 날려버리는 것뿐-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왕의 경우 뒤에 용사도 상대해야 했지만 이정도로 소모된 상황에서, 그리고 아까의 기습이 실패한 순간 사실상 용사를 이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까 최소한도로 친구와 마지막 결착을 짓기 위해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자하광천폭紫霞光天爆!!"

"다크니스 프로미넌스!"

보랏빛을 띄는 칠흑이 시야를 가렸다. 모든 것을 태우는 마계태양의 빛이 마왕의 손에서 발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경각에 달한 목숨. 그저 전력을 다해 기술을 발할뿐-

"타핫!!!"

주먹을 내지르자 무지막지한 노을빛이 폭산했다. 칠흑의 태양빛과 자색의 노을. 두개의 강렬한 빛은 안그래도 반파상태인 마왕성은 두 무지막지한 기술에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용사-"

붕괴가 끝나고 붕괴에 의한 먼지가 가라 앉자
마왕은 침음성을 흘리며 불타오르고 있는 옆구리의 검상을 바라보았다. 무너지는 마왕성, 그 파편속에서 정확히 그의 위치를 파악하고 자신이 눈치채기도 전에 절대선공의 검기로 그를 베어버린 것이었다.

이쯤되면 방해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보다도 경의가 생겼다. 이런 칼을 휘두루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검기劍技만으로 자신을 베었다는 것에 말이다.

"이리되면 서로 양방패인가... 아쉽군. 한번쯤은 이기고 싶었는데."

검상에서 피어오르던 불길은 이윽고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전신을 태우기 시작했다.

"미련은 없다. 유일한 미련이라면 나의..."


마왕은 마지막말을 채 끝내지 못한채 이내 엘류시온에서 발해진 성화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용사는 그런 마왕을 무시한채 재빨리 선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사투의 영향과 출혈로 이미 생사의 갈림길에 선 상황 용사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이 쓸 수 있는 치유술 중 최상위의 치유술 '여신의 눈물'을 사용했다.

찬란한 녹광이 선배의 몸을 감싸며 마치 시간을 역행시키듯 그 몸을 치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료가 반정도 진행 되었을때 선배에 대한 치료를 가속화하기 위해 힘을 발휘하던 후배는 문득 선배에게로 향하던 자신의 힘이 차단된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둥그런 막을-

"뭐?"

그것은 자신이, 그리고 선배가 소환되었을때랑 같은 현상. 용사는 재가 된 마왕의 시신을 보며 그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용사의 일은 마왕을 없에는것. 그 역할이 끝난 용사는 이 세계에 사람들, 특히 원력자들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이 세계도 어쩐지 용사는 그다지 반기지 않는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왕을 쓰러뜨린 용자를 기다리는것은 가차없는 강제송환. 물론 이쪽에 소환되었을때처럼 선배의 몸을 잡고 있다면 같이 돌아갈 터였으나 지금은 떨어져 있는 상황. 결국 자신만이 강제 송환된다는 이야기였다.

강제 소환과 강제 송환 대상은 오로지 '용사' 뿐이었으니까.

"선배!!!!"

용사의 비통한 외침과 함께 빛의 기둥이 마왕성에서 생겨났다. 대륙 전역에서 용사의 귀환을 알리듯 빛나는 빛의 기둥을 본 사람들은 오랜 싸움이 끝났음을 기뻐하며 용사를 찬양했고 살아남은 마족들은 마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용사를 저주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아니 끝날뻔 했다.

한 소녀만 아니었다면...



"아버지..."

마왕의 성 가장 안쪽방에서 나온 소녀는 폐허가 된 어전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 웅장하던 어전은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천장은 완전히 부서져 통기성 200%를 자랑하고 바닥도 여기저기 무너져 불안불안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런 어전을 살펴보던 소녀는 아버지로 추정되는 재가 된 시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것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이번대 용사는 여자라 들었으니 아마도 아버지를 죽이고 강제 송환된 용사의 동료겠지...'

그렇게 생각한 소녀는 품안에 가지고 있던 단도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갔으나 이내 아버지가 마지막 싸움에 들어가기전에 하 말인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으란 말을 떠올리며 단도로 가져가던 손을 내렸다. 잘 생각해보면 그녀가 죽일 수 있는 상대일리 없었다. 상대는 아버지와 맞서싸운 용사의 동료. 아무리 기절한 상태라도 10살도 못되는 여자아이가 휘두른 단도가 강철과도 같은 육체를 지닌 전사의 몸을 꿰뚫을 수 있을리 없었다.

더구나 그 단검이 전투용도 호신용도 아닌 의례용이라면 더더욱

"으음..."

"응?"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신음성을 들은 소녀는 눈앞에 사내를 보았다. 정신이 든건지 아니면 고통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소녀는 다시한번 눈앞에 사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고민해야만했다.

그 사이 일어난 사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딘거지? 난 왜 여기에..."

사내의 반응에 소녀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향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아빠 괜찮으세요?"

"뭐? 아빠라니"

"아빠도 참 아까 머리 맞은데가 안좋으셨나. 아빠의 양녀인 미아에요"

"미아?"

사내는 그 말에 뭔가를 떠올릴듯 갸웃 거리렸지만 자신을 딸이라 주장하는 미아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히 심하게 구른건지 옷이 너덜너덜 했기에 사내는 주변에 남아있던 천을 주어 몸에 둘렀다.

아무리 딸의 재촉이 있다지만 너덜너덜한 옷 그대로 나서기에는 역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상식이 용납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빠, 빨리!"

"그래, 잠깐만-"

먼저가던 미아를 뒤따라 걷던 사내는 문득 머리 한켠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물론그것이 정말 사내의 이름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이름에서 울리는 그리움은 그것이 분명 자신의 이름이란 것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었다.

"시준.. 한시준"

그것이 사내의 이름이었다.



"선배... 선배!"

홀로 원래 세계로 돌아온 후배는 모든것의 시작이자 자신과 선배가 이 세계로 소환되었던 장소인 중앙공원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선배를 데리고 오지도, 살리지도 못한채 자기 혼자만이 선배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채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런건 아니라구!"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아직 전달하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을, 이러한 마지막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정할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치료는 선배에게 닿지 않았고 선배가 입은 상처는 불완전한 치료로 살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선배는 저쪽 세계에서 죽은 것이다.

용사라면 뭘 하는가? 지상 최강의 인간이면 뭘하는가?

은애하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한 존재인데 말이다.

깊은 슬픔에 잠긴 후배는 문득 자신이 겪은 모든것이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자신이 입고 있는 용사의 갑옷과 용사의 검인 엘류시온이었다.

지난 1년간 자신의 손에 완전히 익어버린 용사의 검 엘류시온은 아직도 자신의 손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용사의 힘에 반응해 용사가 가진 재능과 의지를 힘으로 바꾸는 보구.

그리고 절대불변하는 용사의 증표.

결국 현실도피조차 하지 못한 여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놓아 울었다.

"바보야 날 좋아한다면서 왜 날 혼자두는거야. 선배"

여인의 이름은 신아영. 선배, 한시준의 대학 후배이자 이세계의 용사, 그리고 한시준이 수년간 찾아다닌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