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공용 창고

 

 

기억나는 것은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 뿐이다.


[……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아. 어떻게 목숨만은 간신히 건졌지만… 이 아이의 미성숙한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데미지를 입었어. 아마 평생 낫지 않을걸. 당연히 당신들이 바랬던 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퇴보해버렸을지도 몰라.]


'하늘색의 빛'은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화가 난 기색이 강하게 담겨있다.


[이런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이 계획에 반대했던거야. 애초에 너무 무모했어. 날짜가 얼마 안남아서 초조한 기분이었던 건 이해하지만, 결국 당신의 아이한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입혔잖아.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거야?]
[……]


이어진 '하늘색의 빛'의 말에도, 그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은, 그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이슬로기아와 스키아드럼은 이미 돌아갔어. 하지만, 그들은 이번 일로 배운 게 있는 모양이야. 아마 당신이 한 일을 응용해서 아이들에게 시험해볼 생각인 것 같던데.]
[…… 그런가.]


간신히, 대답이 나온다. 정말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다.


[그 아이, 오래 살게 하고 싶으면 더이상 무리시키지 않는게 좋을거야. 한번 더 같은 일이 벌어지면, 다음에는 내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테니까.]
[알고 있어. 도와줘서 고맙다. … 그란디네.]


이윽고, '하늘색의 빛'이 사라지고.
나와 그만이 남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와 '하늘색의 빛'이 나눈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내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하려던 일이 망쳐졌다는 것이다.


"랜드, 마이트……"
[… 일어난거냐.]


아팠다.
누운 채로 그의 이름을, 그 한마디만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그만큼 아팠던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아픔조차 참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가… 잘못한… 거지…?"
[……]
"내가, 실수해서… 이렇게 되는 바람에… 엉망이 된… 거잖아…"


그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때의 내가 좀더 강했더라면.
그 '일'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더라면.
조금쯤은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미안… 내가, 이렇게… 약해서… 정말로, 미안…"


[…… 이제 됐다. 더 말하지 않아도 돼.]


나 정도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그의 몸이 움직인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틀린 건 나였다. 사과를 해야하는 건 나야… 내가, 잘못한거다…!]


그의 거대한 머리가 내 앞에 놓여진다.


그는 울고 있었다.
언제나 크고.
언제나 강하고.
언제나 엄하고.


그러면서도 상냥했던 그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욕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어… 내가 그런 바보같은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네 몸이 이렇게 망가지는 일따윈 없었을텐데… ]


아니, 다르다.
그는 어디까지나, 나를 지금보다 강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뿐이다.
그러니까 나쁜 것은 그것을 버텨낼 수 있을만큼 강하지 못했던 자신이다.


그렇게 말을 해줘야 했는데.
울고 있는 그를 보고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랜드마이트는, 내 눈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 미안한데, 다시 한번 말해줄래?"
"이걸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있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이젤 그림어스는 크게 한숨을 토하며,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안경을 벗어 그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올리자, 이젤과 같은 「페어리테일」 소속의 소녀 마도사 라키 올리에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은 한장의 종이. 이곳 마도사 길드 페어리테일이 들어온 의뢰를 이런 「현상금 수배서」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게시판에다 걸어둔 다음, 그 일을 하길 원하는 마도사가 그것을 가져가는 방식을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가져온건데?"
"나는 지금 긴급하게 자금이 필요하고, 지금 길드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런 일을 같이 해줄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었으니까."
"…… 아아, 과연 그런 거구나."


무슨 이야기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 이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두번째 한숨을 토한다.
평소 때였다면 별로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를 받아줬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다.


"저기 말야, 라키. 나 오늘은 일 같은 거 하지 않기로 했는데."
"알고 있어, '그 날'인 거. 하지만 이번 의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이젤이 페어리테일에 들어온지 벌써 7년.
그가 보름에 한번, 한달에 두번 '어떤 꿈'을 꾸고 컨디션이 굉장히 나빠지는 날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길드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라키 역시도 그 '대부분'에 속해있고.


'… 뭐, 그걸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니까 문제없겠지.'


상당히 기묘한 말투를 쓰긴 해도, 라키는 총명하다. 그런 그녀가 무리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 정말로 문제가 없는 거겠지.
일단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보고. 그렇게 생각한 이젤은 그녀에게서 의뢰지를 받아들었다.


"…… <애완동물 수색>, 10만?"


비싸다. 상당히 비싸다.
고작해야 애완동물 수색에 10만이라니. 길드의 신참인 루시 하트필리아가 지금 살고 있는 방의 한달치 집세를 내주고도 3만이 남을 정도다(물론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 뿐이고 실제로 대신 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 나랑 같이 하고, 반으로 나누자."
"그건 좋지만 말야. 이거… 왜 이렇게 비싸?"


게다가 고작 애완동물 찾기에 이런 보수가 붙었는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남아있었던걸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곧바로 풀렸다. 라키가 의뢰서에 적혀있는 문장 중 한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기 때문이다.


<의뢰인 : 코제트 맥시밀리언>


이젤이 알기로, 이곳 매그놀리아에서 맥시밀리언이라는 성을 쓰는 집은 하나 뿐이다.
도시 바깥과 가까운 언덕 위에 저택이 있고, 매그놀리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귀족 가문인 맥시밀리언 남작가.
그들이 유명한 이유를 꼽자면 역시 귀족이라는 점도 있고, 선선대까지가 대단한 무기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점도 있으며, 얼마 전에 벼락출세한 집안인 '콜도바' 가문과 틈만 나면 싸움을 벌여 시내를 시끄럽게 만든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유명한 것은 그 괴이하기 짝이 없는 애완동물 취미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 저런 거 애완동물로 키워도 되는거야? 라고 할까 도시 안에 있으면 안되는 물건이잖아!"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법한 맹수나 마수. 맥시밀리언 가문은 그런 것들을 대대로 애완동물로 길렀다.


요즘 들어서 유명한 것이라면 가장인 남작이 기르는 거대한 바다코끼리 <빅팽>, 장남의 코끼리같은 상아를 가진 공룡 <엘리펀트 사우르스>, 그리고 차녀의 얼룩무늬 고릴라인 <제브라 콩> 정도가 있다. 특히 마지막 녀석은 시내에서 날뛰던 것을 같은 페어리테일 소속의 동료 마도사, '나츠 드래그닐'이 때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목격하고는 희희낙락하며 때려눕히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지만, "애초에 그런 맹수의 목줄을 풀어놓고 지낸 쪽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내려져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결국 그 뒤로 그 집안의 차녀는 나츠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박박 갈게 됐다고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코제트라면, 그 집안 막내지?"
"응. 딸 셋 중에 막내."


부모와 아들 둘과 딸 둘이 전부 '저런' 것들을 키우고 있었으니 막내라고 해서 제대로 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다들 이 의뢰를 피한 거겠지.
보통 애완동물 수색이라면 몰라도, 마수일지 요수일지 모르는 물건을 찾는 일이라면 10만의 보수도 무색하다.


"정확히 어떤 걸 찾아야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그쪽으로 가서 직접 들어야돼. 아무튼… 할 거야?"
"… 하는 수밖에 없잖아. 너 혼자서라도 갈 생각이지?"
"물론. 내 마법이라면 왠만한 맹수라도 상처없이 포박하는데 문제없으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집안 애완동물에 방심은 금물이다. 제브라 콩이 날뛸 때 상대한 나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당히 즐거웠다"="꽤나 애먹었다"고 하니까.
… 결국 언제나 이렇게 된다. 오늘 세번째의 한숨을 쉬며, 이젤은 책과 안경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알았어. 나도 같이 갈게."
"응응, 너라면 그렇게 행동해줄거라고 생각했어."


이젤의 대답에, 라키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제가 의뢰인인 코제트 맥시밀리언입니다."


저택으로 찾아간 두 사람은 잠시 기다린 끝에 의뢰인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7, 8살 쯤 되보이는 작은 소녀. 하지만 그 언동에는 귀족 특유의 기품과 오만함이 담겨있고, 기본적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강하다.


'오래 있고 싶진 않네.'


라키는 그렇게 생각하고, 영업용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페어리테일의 마도사입니다. 의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늦게 오셨네요. 하루만 더 지체되었더라면 저희 가문의 경비병들에게 수색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 그래서였던가. 이 저택에 왔을 때 경비병들이 묘하게 친절했던 이유가.


"뭐, 가능하면 언니의 그 시건방진 고릴라를 때려눕혔다는 「샐러맨더」가 와주길 바랬지만,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 당신들이라도 상관없어요."


꼬맹이 주제에 건방지긴. 라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젤은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하는 샐러맨더, 나츠 드래그닐은 화룡의 힘을 가진 '멸룡마도사'로서 그 전투력은 페어리테일 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본인이 터무니없는 호전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그걸 자제할 생각이 없으니 <애완동물 수색>같은 일을 맡을 리도 없거니와 한다쳐도 그 애완동물을 상처없이 잡아오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는 커녕 이 저택이나 안날려먹으면 다행이지.'


이젤이 그런 일을 생각하는 동안, 라키가 본론을 꺼냈다.


"그럼 곧바로 일 이야기를 시작하죠.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거고 눈에 띄는 특징이라거나 할 게 있나요?"
"장소는 여기서 멀지 않아요. 도시 장벽 바깥에 있는 숲 속이니까. 저번 주에 피크닉을 갔을 때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머리 부분에 분홍 리본과 꽃모양 브로치를 달고 있으니까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이름은 '세실리아'라고 해요. 제일 좋아하는 건 아르마쥬에서 파는 딸기잼하고 마로블랑의 햄이에요."


<숲속이라는데, 괜찮겠어?>
<땅을 밟고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젤의 대답에 라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일을 시작해도 괜찮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그 애완동물은 어떤 동물인가요?"


일단 이 꼬마도 이 집안 사람이고 하니 평범하게 강아지나 고양이일거라곤 기대도 안한다.
그렇게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두 사람이었지만, 소녀의 대답은 그것마저 능가했다.

 


"샌드웜이요."

 


"…… 네?"
"샌드웜의 새끼예요. 빨리 찾아와주세요. 지금도 혼자 무서워서 떨고 있을테니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돈 많은 인간들 머리 속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평범하게 개나 고양이로 하면 안되는거야?"


라키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거세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젤로서도 그 기분을 이해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일은 일이다.


"취향은 자유라고 하니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취향은 자유라고 하지 않아. 방종이라고 하지. 게다가 샌드웜은 마물이고."


본래 샌드웜이란 '갯지렁이'를 뜻하는 단어지만, 일반적으로는 동명의 마물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갑각으로 뒤덮힌 지렁이같은 형태를 하고서 땅속을 돌아다니는 요수. 전부 성장하면 몸길이 30m는 가뿐히 넘긴다고 하고 간혹 50m 이상의 개체도 보인다고 하는, 생태계의 괴물이다.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견고한 껍질로 인한 방어력과 철판도 우습게 꺾어버리는 괴력, 그리고 바위도 씹어삼킬 수 있는 이빨과 소화력 등 위협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코제트는 그런 물건을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건 기르는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잖아? 게다가 듣기론 아직 새끼라고 하던걸."
"새끼라도 길이 1m짜리 지렁이야. 가능하면 보고 싶지도 않다구. 게다가, 거기에다 리본에 브로치? 이름까지 세실리아? 무슨 정신인걸까."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서도 두 사람은 코제트가 '세실리아'를 잃어버렸다는 숲 바로 앞까지 들어왔다. 나올 때는 아침이었지만, 어느덧 점심 시간을 지나고 있었기에 해가 높이 떠있다.


"어때? 찾을 수 있겠어?"
"응, 뭐… 잃어버렸을 때부터 이 숲에 그대로 있다면 찾을 수 있어."
"샌드웜은 원래 한번 둥지를 정하면 그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고 하고… 아직 새끼라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멀리 갈 수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도망쳐봤자 여기에서부터…"


라키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발밑을 가리키고, 그대로 선을 긋듯이 움직여 숲 너머의 산을 향했다.


"… 저기까지 정도."


덧붙여서, 아까 나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탐문해본 결과 최근 이 근처에서 야생동물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빠짐없이 챙겨들었다.
하지만 코제트의 수행원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근처는 왠만큼 훓어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기에 없거나.


"아니면 굉장히 꼭꼭 숨어있거나 둘중 하나겠지."
"그것때문에 내가 온 거기도 하고 말야."


이젤은 끼고있던 장갑을 벗고, 맨손을 바닥에 갖다대어 눈을 감고 마법을 사용했다.


「대지의 고동」


전신의 신경을 손바닥에 집중시키고, 손을 댄 지면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을 느껴 목표물을 찾아낸다. 말그대로 온 신경을 다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을 때 기습당하거나 했다간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져버리겠지만 지금처럼 동료가 곁에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 문제없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난다.


그리고.


"…… 찾았다."
"어디야?"
"여기서 좀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는 바람에 좀 오래 걸렸어.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범위 내라서 찾을 수 있었지만. … 저기."


이젤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숲 너머의 '산'이었다.
그것을 본 라키가 가볍게 혀를 찬다.


"… 정말로 저기였던거야?"
"응. 아마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해.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긴 했지만, 제일 '샌드웜처럼 큰 지중생물이 내는 것 같은 진동'은 저기서 밖에 안났으니까."


설명을 들은 소녀는 침음성을 흘렸다. 저 산은 예전부터 발칸같은 마물들이 날뛰기로 평판이 나쁜 하코베 산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을까? 얼마 전에 마카오 씨가 발칸을 19마리나 퇴치하기도 했고, 그걸 찾으러 간 나츠가 날뛰기도 했었잖아."
"하긴. … 좋아. 그럼 빨리 끝내고 복귀하자."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다.

 

 

 


"여기 맞지?"
"응. 아까 진동을 느꼈던 장소는 이 바로 아래야. 꽤 깊긴 하지만."


매그놀리아 뒷산 중턱.
이곳에서 이젤과 라키는 수색을 시작하기로 했다.
위치는 파악했지만,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다. 가능한 한 상처없이 잡아야 돈도 제대로 줄 것 같으니까.


라키는 매그놀리아에서 나오기 전에 들린 도서관에서 대여해온 책을 꺼냈다. 샌드웜을 비롯한 마물들의 생태가 기록된 서적이다.


"아마 이 근처에 동굴이 있을거야. 크든 작든. 아무리 샌드웜이라고 해도 먹이를 먹을 때는 땅 위로 나와야하고, 그러려면 이미 있는 동굴을 이용하는 게 제일 좋을테니까."


아무리 샌드웜이라고 해도 땅속을 들락거릴 때마다 새로 구덩이를 판다는 것은 귀찮은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동굴을 둥지로 삼거나, 자신이 새로 만든 동굴을 그대로 확장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 라고 라키가 덧붙였다.
라키가 시키는대로 주변을 수색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이 하나가 간신히 기어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한 동굴 하나가 발견되었다. 아니, 이 정도면 동굴이 아니라 구덩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찾긴 찾았는데 동굴 크기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네. 이제 어떻게 할까."


라키가 잡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으려니, 이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가서 잡아올까?"


이젤의 체격은 라키와 비슷한 정도였지만, 그에게는 땅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도 있다.
하지만 라키는 이젤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돼. 네 그건 속도가 별로 안나오잖아? 만약에 '세실리아'가 낌새를 느끼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질거야."
"… 그럼, 마을로 돌아갔다가 그 뭐냐… '세실리아'가 좋아한다는 잼이랑 햄을 사와서 유인한다는 방법은?"


자신이 말한 거지만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키는 그 의견마저도 기각한다.


"그것도 안돼."
"…… 에? 어째서?"
"나 그 꼬마가 말한 '아르마쥬의 잼'이나 '마로블랑의 햄'이라는 거 알거든? 그거 고급품이라 터무니없이 가격 높아."
"어느 정도로?"
"그 잼 한병하고 햄 한토막에 우리 3일치 식비가 사라져."


… 하여튼 돈 많은 것들이란. 이젤과 라키는 한마음 한뜻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것도 관둔다고 치고. 어떻게 잡을 생각이야?"
"아아. 마침 좋은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어. 지금 바로 마른 나뭇가지 좀 모아줄래? 가능한 한 잔뜩."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라키는 이젤에게 지시를 내렸다.
2분 정도 지났을까. 이젤은 라키의 앞에 나뭇가지들을 수북히 쌓아올렸다.


"샌드웜은 기본적으로 야행성이야. 낮에 자고, 밤에 먹이를 찾지. 그러니까 지금쯤이면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시간.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가까이 가면 금방 눈치채버릴테니까 섣불리 접근할 수 없어."
"그럼?"
"당연하잖아.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면, '세실리아' 쪽에서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 말을 끝으로, 라키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그녀는 흡연자가 아니지만(애초에 18살이긴 하지만), 있으면 여러가지로 편리하다는 이유로 갖고 다니고 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돌에 긋고 불을 붙이고, 동굴 입구에 쌓아놓은 나뭇가지에 던져넣었다. 나뭇가지더미는 곧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하며 동굴 안으로 연기를 흘려보냈다.


"아아, 너무해… 훈제로 만들 셈이야?"
"빨리 안나오면 그렇게 될지도. 그치만 샌드웜은 소리랑 냄새에 민감하니까 금방 반응이 올거야. 동굴이 깊다면 시간이 좀 소모되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세실리아'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엄청난 기세로 몸을 움직여, 연기를 뚫고 구덩이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나타난 것은 몸길이 1m에 달하는 갈색 지렁이다. 아직 유생체이기 때문에 갑각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 한복판의 외눈과 그 바로 밑에 달려있는 동그랗게 벌려진 입에, 빈틈없이 돋아나있는 이빨들은 분명 샌드웜의 것이다. 머리 제일 윗부분에는 마물임을 뜻하는 작은 뿔이 나있고.


거기에.
흙과 먼지가 묻어 상당히 더러워지긴 했지만, 머리 부분에 묶여져있는 분홍색 리본과 꽃모양의 브로치는 이번 일의 목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고.


"우드 메이크! 「사냥꾼의 우리」!!"


'세실리아'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라키가 소리치며 마법을 발휘한다.
그녀의 마법 「우드 메이크」는 그 자리에서 나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기로, 공격과 방어 양쪽 모두에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나무줄기를 엮어 '끈'을 만든 다음 표적을 포박하는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기이이이이이익!!]


나무 줄기에 묶여 바닥에 떨어진 '세실리아'는 유리를 긁는듯이 기분나쁜 소리를 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유생체에 불과한 몸으로는 라키가 우드 메이크로 만들어낸 나무줄을 끊을 수 없었고, '세실리아'를 옭아멘 줄은 이윽고 나무 우리로 형태를 바꿨다.


"포획 성공! 이제 가져가기만 하면 돼!"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끝났네."
"그야, 너하고 내가 온 거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만 아니라면 못잡을 리 없지."


지면에 발을 대고 있는 것이나 땅속에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찾아낼 수 있는 이젤과, 상처없이 상대를 포박할 수 있는 라키. 두 사람의 조합은 이런 '생물 포획' 의뢰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이 최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돌아가자, 라고 라키가 말하려는 순간.


─숲속에서 수풀을 헤치고, 커다란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쿵, 쿵, 쿵, 쿵, 쿵─


무거운 발소리. 어딜 어떻게 들어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지면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 그것으로 느껴지는 무게. 인간보다 훨씬 큰 생물이다.
이젤과 라키는 거의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무를 꺾으며 등장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우호호호호호호호홋. 인간! 찾았다!]


이상할 정도로 뾰족한 귀. 정수리 부근에 나있는 외뿔은 평범한 맹수가 아닌 '마물'이라는 증거.
상체의 근육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발달한 유인원 형태의 수인(獸人).


"「발칸」?! 어째서 이런 곳에…!"
[우호홋. 페어리테일한테는 빚이 좀 있어서. 너희들도 페어리테일 녀석들이지?]


발칸의 말에 라키와 이젤의 표정이 굳었다.


'이 녀석 설마…'
'마카오랑 나츠한테 당한 패거리의 잔당인가?'


그렇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발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전투 준비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호홋, 이렇게 해줄테다!!]


대답과 동시에, 발칸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그 거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도약력.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발칸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강하게 움켜쥔 두 주먹을 내리치며 이젤과 라키 사이에 떨어진다.


─쾅!


"윽!"
"……!"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같은 크레이터를 만들어낸 발칸의 공격.
두 사람은 재빨리 양 옆으로 흩어져 직격만은 피했지만,그럼에도 충격파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먼지구름과 위력으로 인한 바람이 두 사람을 휩쓸었고, 잠시동안이나마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 녀석… 상당히…!'
[우호호홋!!]


그 먼지구름을 헤치며, 발칸은 가까이에 있는 라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라키도 또한 미리 대비를 하고 있어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우드 메이크! 「마음의 거리감」!"


손바닥을 바닥에 갖다대는 순간, 녹색의 마법진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며 빛을 발한다.
그 직후, 바닥을 뚫고 두꺼운 나무로 이루어진 기둥과 벽들이 솟아오르며 발칸을 공격했다.
같은 페어리테일의 마도사, 그레이 풀버스터의 「아이스 메이크」와 마찬가지로 원소를 이용해 자신이 이미지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조형마법. 그렇기 때문에 그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미지할 틈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우홋!]


자신의 코앞에서 나무벽과 기둥이 솟아났는데도, 발칸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아니, 단지 피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벽들과 기둥 사이로 들어가, 마치 숲속에서 나무를 타는 것처럼 이리저리 날뛰어 헤치고 나온다.


"그런, 거짓말?!"


설마 그런 방식으로 돌파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라키가 경악한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샌드웜을 가둬두고 있는 나무 우리까지 들고 있다. 발칸의 공격에, 제때 반응할 수 없다.


맞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라키의 허리를 끌어안은 이젤이, 나무 우리까지 들고서 발칸의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린다.


"꺄앗?!"


갑작스러운 가속에 놀란 라키가 살짝 비명을 지르는 동안, 발칸의 주먹이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있던 장소를 강타한다.
바위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바닥이 내려앉는다.
제대로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젤은 발칸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고 생각하자, 라키와 나무 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세실리아' 챙기고 뒤로 물러나있어줘. 지금부터는 내가 할테니까."
"괜찮겠어? 오늘은…"


라키가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다.
마력도, 신체의 상태도 평상시보다 떨어지는 날. '그 꿈'을 꾼 날은 언제나 이렇다.


"응. 그래서 곤란해. … 저만큼 활발하게 날뛰는 상대라면, 봐주지 못할테니까."
"… 알았어. 조심해."


이젤의 말을 들은 라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우리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


'… 결국 힘쓰게 되네.'


오늘만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이젤은 발칸과 마주보고 선다.


[우홋. 작은 인간. 나랑 싸울 생각? 우홋! 우홋! 바보! 바보! 바아~보오! 약해빠진 인간이!]
"마음대로 말해도 좋지만, 우리들한테도 일이 있거든. 그러니까… 오래는 못 놀아줘."
[우홋, 우홋. 오래? 놀아? 그럴리 없지이. 왜냐하며언~]


이젤의 말에 히죽거리던 발칸이 자세를 낮춘다.
사냥감을 덮치기 전의 맹수처럼, 언제라도 돌진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한방이면 끝이니까아아아아아!]


그 엄청난 다리 힘으로 단숨에 도약하여, 이젤을 향해 뛰어든다.
보통의 기사, 어지간한 마도사라면 어떻게 공격당했는지도 모르고 당할만큼 빠른 공격. 게다가 위력마저도 충분하고 넘칠만큼 강하다.

 


그 주먹이,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때린다.

 


[우홋?!]


없다.
분명 자신의 주먹에 맞아 납작해졌어야할 '작은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발칸은 바닥에 꽂힌 주먹을 뽑아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그런 발칸의 뒤에서, 이젤이 수인을 맺으며 소리친다.


"토둔, 「암석수리검」!"


이젤이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지면의 암석에서 몇개의 파편이 떨어져나온다.
십자수리검의 형태로 깎인 그것들은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며 날아갔고, 그대로 발칸의 등에 부딪혔다.


[우오오오옷?! 아프다아아아아아?!]


그제서야 발칸은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수리검이 꽂힌 등판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이, 이게! 어느 틈에, 내 뒤로?!]


발칸이 돌진하는 순간, 발칸을 훨씬 웃도는 속도로 그를 뛰어넘어 뒤로 착지한 것이지만, 그것을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젤은 침묵을 지키며 전투 자세를 유지했다.


[너, 너! 땅 속성의 마도사구나! 맞지이! 그, 그렇다면!]


발칸은 그대로 위로 뛰어올라, 옆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탄다.


[따,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있으면! 너, 너는 나를 공격 못해! 우호홋!]


… 그래도 아예 바보는 아니었군. 이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겹쳐서 앞으로 내밀었다.


"확실히, 속성은 땅이지만 말야."
[우호홋! 우호홋!]


발칸은 기쁜 듯이 나무 위에서 춤을 추며, 나뭇가지(라고는 해도,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의 창에 가까울 정도로 길고 굵다) 하나를 꺾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던져 공격할 모양이다.


그러나.
이젤의 공격은 그보다 빠르다.


"수둔, 「수백철류포」!"


두 손의 사이에서 생겨난 물이 오른주먹을 휘감는다.
앞으로 나아가며 그 주먹을 발칸에게 내지르자, 주먹을 감싸고 있던 '물덩어리'는 포탄과도 같은 기세로 날아가 나무 위의 발칸을 강타했다.


[우호호호호호오오옥?!]


느닷없이 얼굴에 물포탄을 뒤집어쓴 발칸은 그 고통에 허우적거린다. 위력도 실제 포탄급에 가까웠지만, 무엇보다도 눈과 콧구멍으로 다량의 물이 흘러들어갔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 한참을 퍼덕거리던 발칸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고, 이젤은 그런 발칸에게 추가 공격을 가한다.


손가락과 손가락의 사이.
한손에 네개씩, 오른손과 왼손에 '불이 붙은 작은 구슬'을 끼우고는 고릴라 마물을 향해 던졌다.


"화둔, 「작열연기탄」!"
[우고고고고옷!]


마력의 불을 담은 폭약탄. 그런 것이 8개.
발칸의 몸에 닿자마자 폭발을 일으킨 폭탄은 발칸의 몸에 불을 붙였고, 발칸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속성이 땅이라고 해서, 다룰 수 있는 것도 땅뿐이라는 건 아냐. 보다시피, 물도 불도 쓸 수 있거든."
[우고옷… 이, 이 꼬맹이가아아아!!]


생각지도 못한 공격들에 부상을 입은 발칸이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분노로 인해 근육이 팽창하고, 그에 따라 공격에 실린 힘도 증가한다.


[우고오오오오옷!!]


암석조차 아무 문제없이 깨트려버리는 주먹이, 이젤의 작은 몸을 강타하고.

 


─그것은, 조금 굵은 나무토막으로 변했다.

 


[우홋?!]
"인법, 「바꿔치기술」."


발칸의 등뒤에서 이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릴라 마물은 뒤늦게 몸을 돌리려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젤의 발차기가 그의 뒤통수에 꽂힌다.


[우고오옥!]


강렬한 충격과 함께 균형을 잃어버린 발칸은 앞으로 나동그라졌고, 이젤은 그 반동으로 몸을 띄워 발칸과의 거리를 벌린 후 바닥에 착지했다.


[너, 너! 마도사, 아니다! 마도사는, 이런 거 안쓴다!]
"실례네. 나 마도사 맞아. 정확히 말하면, 마도사인 동시에 '닌자'인 거지만."


몸을 일으키며 삿대질을 하는 발칸을 상대로, 어디까지나 차분하게 대답한다. 물론 경계를 푸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니, 닌자?]
"응. 사정이 있어서 몸이 약하거든, 나. 그래서 나츠나 그레이처럼 몸으로 치고받는 거 잘 못해."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기술들을 익히는데 노력을 투자해왔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동방의 「인술」과 자신의 마법을 섞은 독자적인 전투술. 거기에 화둔술과 수둔술을 비롯한 술법들에, 방금 전 사용했던 폭약탄과 같은 도구들과 눈속임을 이용한 바꿔치기술 등의 수많은 인법까지.
'기술의 숫자'라는 점만 놓고 본다면, 이젤은 페어리테일 멤버 중에서도 최고 레벨로 손꼽힌다.


거기까지 들은 발칸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 인술? 닌자? 뭐,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바로 직후, 바닥에 떨어져있는 흙과 자갈들을 들어올려 이젤에게 던진다.


[주저리, 주저리! 시끄러워! 먹어라아아!]


보통 사람이 같은 일을 한다면 잘해봐야 타박상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찮은 자갈이라도 거기에 발칸의 괴력이 더해지면 사람의 피부 정도는 우습게 뚫어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닌다.


그 자갈의 탄환들은, 세명의 이젤 중 가운데의 이젤을 꿰뚫고 지나간다.
관통당한 '이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둘이나 남아있다.


[우, 우혹?! 느, 늘어났다아?!]


인법 「분신술」.
그 이름 그대로, 여러개의 분신을 만들어내 상대를 현혹시키는 닌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기술이다.
물론 마물인 발칸이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을 리 없고, 그저 갑자기 숫자가 늘어나버린 적에게 당황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눈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두명의 이젤은 발칸을 가운데에 놓고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를 어지럽혔다.


[우, 고옷?! 왼, 아니 오른쪽, 아니아니 뒤, 아니아니아니…!]


혼란의 극에 달한 발칸이 마침내 머리를 싸매쥐고 비명을 지르자, 그 흉판을 발로 걷어차 발칸의 거구를 날려보냈다.


[가아아아아아악?!]


2m를 넘어 3m에 가까운 발칸의 거체가 나동그라지며 구르다가, 뒤쪽에 있는 나무와 부딪히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정지한다.
그 사이에 분신술을 멈춘 이젤의 몸이 다시 하나가 됐고, 발칸의 모습을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기절안했어… 평상시였으면 방금 걸로 기절시켰을텐데.'


역시, 조금 과할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이젤이 각오를 굳히는 사이, 발칸이 몸을 일으켜 맹렬히 포효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약간이나마 가지고 있던 이성이 모두 날아가고, 마물로서의 본성을 드러낸다.
실제적인 능력은 변함없을지 몰라도 기세만은 아까보다 훨씬 흉흉해졌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라키가 살짝 몸을 떨 정도로.


'… 더 오래 끌면 안되겠는데.'
[우호호옥! 죽어라, 인가아아안!!]


발칸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이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발칸을 보며, 이젤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만 그것은 한숨을 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숨'으로, 공격을 하기 위해서다.


입으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몸을 살짝 뒤로 젖히자, 그 순간 그의 전면에 갈색으로 빛나는 원형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너머로 달려오고 있는 발칸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친다.

 


"「지룡의 포효」!!"

 


토해지는 것은, 땅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꺾어버리는 '초진동'의 충격파.
소리와도 같은 속도로 발사되는 그것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발칸이 피할 방법은 없다.


충격파는 용서없이 발칸의 거체를 휘말았고.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


─강렬한 폭발을 터트리며, 산 너머로 날려보냈다.

 

 

 


"언제 봐도 굉장하네, 그거."


싸움이 끝나고 이젤이 호흡을 고르는 동안, 라키가 나무 우리를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용을 죽이는 「멸룡마법」. 사람들은 그것을 익힌 자를, 「드래곤 슬레이어(멸룡마도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페어리테일에는 현재 두 사람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소속되어있는데, 그 중 하나가 화룡의 드래곤 슬레이어 「샐러맨더」 나츠 드래그닐.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지룡의 드래곤 슬레이어, 「록 블레이드」 이젤 그림어스. 컨디션이 나쁜 날이라고 해도 발칸 정도는 문제없구나."
"그렇지도 않아. 생각했던 것보다 애먹었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자, 발칸과의 싸움으로 꽤나 여기저기가 파헤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컨디션이었다면 이렇게 되기 전에 끝낼 수도 있었을텐데.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힘이 있으면 인술같은 거 필요없지 않아?"
"… 그건 아냐. 드래곤 슬레이어로서의 나는 강한 편이 아니거든."


아마 순수하게 멸룡마법만으로 나츠와 겨룬다면 5분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불과 땅의 속성 차이는 없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몸이 약하고 멸룡마법의 출력에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신은 나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젤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메울 다른 게 필요한거야. 그러니까 나츠나 그레이들하고도 함께 싸울 수 있는거고."
"흐응……"


이젤의 말에 라키는 납득을 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뭐 됐어. 예상못했던 헤프닝이 생기긴 했지만, 의뢰도 무사히 완수했고,"
[끼이이이…]


라키가 나무 우리를 흔들자, 그 안에 둥글게 말려있는 '세실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보니까 아까 물어보려다가 만 건데."
"응?"
"왜 갑자기 돈이 필요해졌다는 거야?"


이젤이 알기로, 라키는 딱히 사치를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씀씀이가 헤픈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보수를 받아서 어디에다 쓰려고 하는걸까.


"사고 싶은 물건들이 몇개 있어."
"어떤건데?"
"그건 비밀."


라키는 자신의 입 앞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작게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우선은 위장에 먹이부터 주고. 그리고 머리를 절단할거야. 볼일은 그 다음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경악하겠지만, 라키가 특이한 말투를 구사한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놀랄 일도 아니다. 위장에 먹이를 준다는 소린 식사를 하겠다는 소리고, 머리를 절단하겠다는 건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르겠다는 이야기다.
그 이외에 라키의 '특이한 말버릇' 바리에이션으로는 "수면을 취한다" -> "무방비한 시간을 견디다" 등이 있다.


"… 보통으로 이야기하면 될텐데 왜 그렇게 말을 꼬는거야?"
"버릇이 되서.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이젤. 오늘 점심 식사는 내가 금액을 지불할게."
"네에, 네에. … 나도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고 싶으니까."


결국, 처음 예상과는 달리 '힘을 쓰는 일'이 되버렸지만.
동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젤에게 있어서 기분좋은 일이다.


그때문에, 언제나 라키와 동료들에게 휘둘리고 있기도 하지만.


'… 뭐, 아무래도 상관없을까.'


이런 '일상'이야말로.
랜드마이트를 잃어버린 자신이, 「페어리테일」이라는 동료를 가졌다는 가장 큰 증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젤의 발걸음은, 피곤한 몸과는 달리 매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