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공용 창고

주먹을 쥔다. 내뱉던 숨을 멈추며 땅을 밟는다. 신체의 비틀림을 내달리는 주먹에 싣는다.
팡─!하고 허공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면 숨을 들이키며 내지른 주먹과 발을 원위치.
다시 호흡. 다시 일보. 다시 일권.
쥐어짜듯, 반복한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을 꽁지로 묶고, 벗어둔 상체 위로 기어 다니는 온갖 흉터를 땀으로 씻어내며, 이제 갓 어른이 된듯한 사내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주먹을 뻗었다.

그건 단련을 넘어선 괴롭힘.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학대.

고통이 있을 것이다.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친 육체는 휴식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묵묵히 주먹을 뻗는다.

"윽─?"

그런 사내의 고행을 강제적으로 멈추는 건 혹사당한 몸.
다시 주먹을 찌르려는 도중에 덜컥 멈춰버린 사내는 그대로 다리가 꼬이며 흙바닥을 뒹굴었다.

"아야야...."

그제야 바위 같던 사내의 얼굴에 고통이 떠오른다.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
사내가 그대로 대자로 누운체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하길 잠시, 기분 좋은 피로에 취하며 끝도 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는 와중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또 미라젠한테 혼나겠네."

사내는 넘어지는 와중에 돌에 찍힌 것인지 이마에서 흐르는 핏줄기를 닦으며 걱정이 많은 한 소녀를 생각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넘기며 언제까지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라이이~, 또 어디서 다치고 온 거야?!"
"어.....이래저래?."

거대한 홀 안, 수많은 마도사들이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이곳은 심하게 자유롭고 낙천적인 마도사 길드 페어리 테일.
그곳의 카운터에서 은발의 소녀 미라젠이 얼굴의 일자(一)흉터가 인상적인 사내, 라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똑.바.로.대.답.해─"
"으갹! 수, 수련하다가 실수로.....!"

불성실한 대답에는 응징을, 미라젠은 상처를 누르던 알콜솜을 때며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얼굴이 완전 피범벅이 돼서 놀랬단 말이야. 사람 걱정 좀 시키지 마."
"미안, 미안~"

머리를 긁적이며 여전히 불성실한 태도로 웃는 라이에게 미라젠은 볼을 부풀였다.
정말 이 바보는 걱정하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매번 다쳐서 와서는....!

"으악?!"
"자, 치료 끝."

미라젠은 분노와 심술을 담아 반창고를 탁, 하고 쎄게 붙여주며 일어섰다.
다행히 상처가 다시 터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절묘하게 파고드는 고통에 이마를 감싸는 라이.

"하아, 정말 애도 아니고....."

그런 라이는 뒷전으로 두고 투덜거리며 카운터 일을 보기 시작하는 미라젠의 모습을 보며 라이는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게, 23살이나 먹고 뭐하는 건지....'

다치는 거야 라이 개인 사정도 있고, 어쩌다 보니 그런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단순한 찰과상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을 왜 굳이 길드까지 와서 치료를 받을까?
스스로 대충 처리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라지....'

그건 만고의 진리.
그렇다. 라이 풀맨은 눈앞의 소녀 미라젠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이의 짝사랑. 미라젠은 길드 동료 그 이상으로는 생각 안 한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끄는 데에 다치는 건 매우 뭔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치료할 때의 잠깐의 신체접촉을 위해 사소한 건 버리는 게 남자다.

라이는 쓸모없는 생각을 뿌리치듯 고개를 저으며 응급세트를 정리하고 미라젠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없어?"
"어라, 오늘도 의뢰는 안 나가려고?"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라이에게 미라젠은 '뭐, 자주 그러니까.'라고 생각하며 음식이 담긴 쟁반을 넘겨 줬다.

"그럼 이거 저쪽 테이블에 가져다줘."

라이는 언제나처럼 미라젠이 건네준 쟁반을 들고 떠들썩한 페어리 테일 속에 녹아든다.


본디 사람이 모이는 곳엔 소문도 모이는 법이다.

"라이─! 맥주 세 잔만!"
"라이씨! 여긴 음식 추가요!!"
"예에, 기다려!"

특히나 이곳은 온갖 임무를 처리하는 마도사 길드.
그렇기에 이곳으로 흘러오는 소문은 대부분 신빙성 높고 정확한 편이며 다양하다.

"맞아, 라이 혹시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한바탕 폭풍 같은 서빙이 끝나고 주어진 금쪽 같은 휴식시간.
의자에 축 늘어져 멍하니 쉬고 있던 라이에게 뻐드렁니가 특징적인 한 길드원이 다가와 곁에 앉았다.

"북쪽 거리의 괴물!"
"하아, 괴물?"

라이는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했지만, 뻐드렁니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군대에 있는 내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요새 북쪽 거리에 붉은 눈의 괴물이 나와서 사람구분 하지 않고 습격한다 하더라고.
 아직 죽었다는 사람은 없지만 습격당했다는 사람들은 꽤나 있대."
"흐음, 그런데 저번에 나츠에게 거짓말한걸 생각하면....."

영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정확히는 거짓말이 아니고 헛소문을 알려준 거겠지만 말이다.

"아니, 아니, 이건 확실하다고. 아마 조만간 의뢰판에도 올라올걸?"
"헤에,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뭐, 그냥 그랬다고. 그럼 수고해~"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일어선 뻐드렁니는 지나가며 하나의 말을 흘렀다.

"그러고 보니, 미라젠도 북쪽 거리에 살던가~ 엘프먼도 임무 나가서 당분간 없다지 아마?"
".......?!?!!"

소문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냥 퍼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됐든 소문의 뒷면에 존재하기에 돌고 도는 법.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건지 의심스럽지만, 이번만은 감사하기로 라이는 생각했다.

 

잘게 부서진 별빛과 휘영청 둥근 달빛이 밤하늘을 밝힐 즈음에 인적 끊긴 거리를 홀로 걷는 아낙네가 한 명.

"흐응~♪ 가끔은 혼자 걷는 것도 나쁘지 않네."

살짝 웨이브진 은발을 길게 늘어트리고 앞머리는 한대 모아 묶은 그녀, 미라젠은 언제나처럼 길드에서 마지막으로 나와 문단속을 한 후 집으로 향한다.
늘 함께 있던 남동생 엘프먼이 다른 지역의 마물 퇴치 때문에 집을 비워서 평소와는 달리 홀로 집으로 향하고 있지만, 나름 신선하기에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가벼운 스텝. 기분 좋은 흥얼거림.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 뒤를 밟는 그림자.

"흠~ 흐음음~♬"
"......"

미라젠이 길드에서 나온 순간부터 따라붙은 그림자는 행여 달빛이 자신을 비출까 두려워하며 숨소리를 죽이고 발소리를 묻으며
앞선 소녀의 발자국을 조심히 따라 걷는다.

그 행색을 말하자면 스토커. 달리 말하면 변질자. 그도 아니면 변태.

'아니, 전부 그게 그거인데다 그 전에 어느 것도 아니다만.....'

순간의 흐트러짐에 달빛 아래 잠깐 스쳐 지나간 건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 꽁지. 그리고 눈에 띄는 큰 흉터.
그렇다. 그는 라이. 사랑에 괴로워하던 라이는 마침내 짝사랑하는 소녀를 미행하는 스토커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아니라고!'

무엇인가 느낀 것일까? 라이는 이상한 기척에 돌아보는 미라젠을 보고 놀라 건물의 그림자에 숨었다.
이내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미라젠을 보고 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솔직히 본인이 아무리 부정해도 겉으로 딱 보기엔 영락없는 스토커 질이니 들키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그러니 미라젠이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지켜보고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이는 미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쫒아오긴 했는데 그 소문이 진짜일까.....'

라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괴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은 정보들.

-새로이 나타난 신종 마물이다.
-아니다. 마법 실험의 실패로 탄생한 마법 생물체다.
-그건 온통 검은 몸에 붉은 눈을 가졌으며 피를 빠는 괴물이다.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무조건 혼자 있는 사람만 노리며 건물 안까지 들어가면 더는 쫒지 않는다.
-빛을 싫어하는 편이다.

아직도 영 미심쩍어 하기는 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나선 라이였다.
뭐, 당당히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말하고 미라젠의 옆에서 걸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도 아닌 라이로서는 단지 희망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기에 눈물을 삼키며 스토커 짓에 가까운 미행을 할 뿐이다.
물론 제삼자의 시선, 즉 다른 길드원들의 눈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이 무척이나 친밀해 보이는 건 여담이다.

'아, 도착했나.'

어둠에 싸인 한 건물 앞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미라젠. 이윽고 깜깜한 건물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라이는 그제야 걱정되던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뭐, 역시 뜬소문이었나."

그렇다고 치기에는 소문이 너무 구체적이었지만.
하여튼,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다. 라고, 라이는 생각하며 발끝을 돌려 여기에서 정반대 편에 위치한 남쪽 거리 끝자락의 집을 향했다.

 

깊디깊은 밤, 별도 달도 모두가 잠든 시각. 
정적이 무겁게 깔린 거리에 라이는 자신의 발소리를 남기며 홀로 걷는다.

"닿을 수만 있다면~ 닿을 수만 있다면~♩"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를 되뇌며 느긋한 걸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앞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생활비도 아슬아슬하니 내일은 오래간만에 임무라도 해야겠네.'

미라젠을 도와 카운터 일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원봉사에 가까운 거라 라이가 받는 돈은 없다.
물론, 미라젠이 아르바이트 비라며 몇 번 챙겨주려 했지만 라이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때마다 거절했다.
단순하고도 사소한 이유 때문에.

"어쨌든, 한 달 치 집세도 벌어야 하니 좀 위험하더라도 비싼 의뢰를.....음?"

<First Gear>─.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마음을 먹는 순간 라이의 몸을 심지 삼아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오오라.
몸을 내달리는 익숙한 힘의 분류를 제어하며 어둠을 벗 삼아 뛰쳐나온 살기를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간단히 피하고, 뻗어나온 팔을 양손으로 붙잡아 물 흐르듯 엎어치기 한판.
 
쾅─!
[ka──?!!]

보도블록을 깨부수며 땅바닥에 처박힌 검은 인영. 연이어 라이는 망설임 없이 밟아 뭉개려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면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에 애꿎은 바닥만 더 부수고 말았다.

"거......소문이 사실이었나?."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근육을 긴장시키며 경계하는 검은 인영.
어둠에 물든 것 같은 검은 몸에 이목구비를 뭉개고 눈이 있을법한 위치에 달아둔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빛. 보이는 형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지만,
잠깐 맞대본 감촉은 마수, 혹은 마법실험으로 탄생한 생명체와 비슷했다.

미라젠이 혼자 있을 때 나오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지만 이제서야 나타난 이유가 뭐...어.....대충 예상이 된다.
필시 라이가 혼자가 됐기에 튀어나온 것 일테지.
하지만 저것이 무엇이 되었든, 왜 태어났든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확실한 건 저건 적이다.
라이에게 있어서 저 마수는 적이다.

적은,

"제거한다."
[ka, kaaaaaa!]

분노하며 달려드는 검은 괴물. 라이는 그에 맞서 몸을 움직인다.

오행권(五行拳)-곤허(坤虛)

굳게 주먹을 쥐고서 우직하게 일보. 내달리는 팔은 변화 없이 일직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허공을 향해 힘을 때려 박는다.

쾅─!

그와 동시에 명백히 주먹의 밖에 있던 검은 괴물이 불가시의 공격에 얻어맞으며 달려오던 그대로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kr, krr?]

비틀거리지만 바로 일어서는 괴물. 움푹 파였던 몸은 금방 원상태로 돌아온다. 표정은 없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건 당황한 기색.
어째서 당황하는 것 인지 대충 깨달은 라이는 괴물에게 가볍게 말을 걸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넌 마법이 안 통하는 몸 이랬던가?"

내지른 주먹과 발을 원위치. 호흡을 가다듬으며 일순간 다시 일보. 다시 일권.

쾅──!!

재차 튕겨 나가는 괴물.
팔을 올려 방어를 해보지만, 몸이 날아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마법이 아니야."

라이가 익히고 있는 마법은 효능이 단순하지만 확실한, 단계적으로 사용자의 몸을 강화시켜주는 기어(Gear).
마도사인 부모를 두었지만 워낙에 마법에 대한 재능이 떨어졌던 그는 기어 외의 마법은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마법 하나만으로 기뻐해 주는 부모님이 좋았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들려온 것은 갑작스러운 부모의 사망. 
의뢰 도중 마수에게 죽고 말았다는 소식에 검게 고이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고 강함을 소망.
하지만 도무지 재능이 없어 마법으로는 강해질 수 없는 자신에게 절망.

그렇기에 라이는 자신의 살을 깎고, 뼈를 깎고, 영혼을 깎았다.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룩했다.

[kaaaaaaaaaa!!!!]

짜증, 그리고 분노와 울분. 괴성과 함께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가 라이의 뒤에서 다시 나타나는 괴물.
괴물은 손톱을 세워 있는 힘껏 팔을 휘두르지만 라이는 움직임을 읽고, 피해서, 되받아친다.

오행권(五行拳)-철참(鐵斬)

곧게 핀 수도가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고 지나가면, 괴물의 팔은 그 궤적에 휘말려 잘려나간다.
쓰레기처럼 뒹구는 괴물의 팔. 괴물은 피 대신 묘한 연기가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은 느끼는 듯, 비명을 질렀다.

"단지, '기술'일 뿐이지."


'하아.... 이거야 원...'

소문의 괴물은 다행히 걱정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겨우 1단계인 퍼스트 기어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던 것을 보면 아마 길드내의 다른 어떤 마도사가 와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상황은 좋다고 말 할수 없다. 이유는 라이 자신의 몸 때문.

분명 괴물의 공격은 스치지도 않았건만, 아침에 입었던 이마의 상처가 다시 터져 라이의 얼굴을 피로 물들였다.
차오르는 힘에 비례하여 삐걱대기 시작하는 몸. 마비가 오려는듯 떨리는 팔.
바보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증오에 몸을 품고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렸던 과거, 그때 입었던 부상의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 라이를 괴롭힌다.
단지 1단계임에도 라이의 몸은 3단계, 4단계의 기어를 사용한 것 마냥 망가져 간다.

'그래도 저걸 여기서 놓칠 순 없어.....'

[krrrrrrr....]

잘려나간 어깨를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괴물.
겁을 먹은것인지 라이가 슬며시 다가가면 그만큼 몸을 뒤로 뺐다.

저건 여기에서 처치해야 한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미라젠,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

"그럼, 속전속결이다."

─<Second Gear>!

퍼스트 기어 동안 모인 마력을 방출, 기어를 한 단계 더 올려 육체를 강화한다.
라이의 몸을 감싸는 푸른 오오라가 좀 더 짙어진다.
동시에 온몸의 흉터에서 피가 터져나가고, 멀쩡하던 피부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완성되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쓴 피투성이의 혈인(血人)의 모습.
겨우 2단계에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다니, 라이는 자기 신세 한번 처량하다고 생각하며─

축지(縮地).

─검은 괴물의 앞에 나타난다.
경악하는 괴물. 피투성이가 된 라이의 모습에 조금 자신감을 되찾았던 괴물은 사라졌다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보고 놀라 도망가려 했지만
어느새인가 몰린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자아, 끝이다."

쓸데없는 육체의 기능을 멈춘다. 전신에 끓어 넘치는 힘을 응축하고 응축한다.
주먹을 쥐어 힘을 한데 모으고, 내뱉던 숨마저 멈추어 쓸데없이 남은 힘을 긁어모으고,
일보에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고, 비틀어, 내질러, 폭발시킨다.

오행권(五行拳)-염멸(炎滅).

콰-아앙──!!!

수십 개의 폭탄이 일시에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
라이는 괴물의 육체를 분쇄하고 핵을 박살 낸 뒤 나아가 괴물이 기대고 있던 건물마저 날아가는 걸 보며 끝내 기절한다.

아.....또 미라젠한테 혼나겠네.

 

"라이이이잇!!!!"
"아하하하....."

이곳은 매그놀리아 병원의 한 병실.
전날, 마수인지 마법 생물체인지 모를 것을 잡느라 너무 무리한 라이는 전신-열상, 근육파열, 뼈에 금이라는 종합 삼종 세트에 오른팔은 복합골절까지 되고서 병원에 실려왔고,
예상했던 데로 입원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라젠에게 한창 혼나는 중이다.

"아하하, 가 아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물론 미라젠도 밤중에 건물이 날아가는 걸 보고 달려간 군대의 사람들에게 사건개요는 들었다.
북쪽 거리에 풀려난 폭주한 마법생물체.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그걸 처리한 라이.
비록 정식 의뢰로 들어온 일은 아니었지만, 거리의 안전을 유지했다는 평에 건물 한 체를 완파, 거리를 반파 한 것은 좋게 넘어간 것.
(하지만 페어리테일 사건사고 기록에 남겨졌다는건 사견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는가?
게다가 라이의 거주지는 남쪽 거리 중에서도 외곽. 도대체 왜 정반대 편에 살던 라이가 그 밤중에 북쪽 거리를 지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야, 기어 2단계는 그렇다 치고 염멸은 오버였나~ 아하핫."

움직이지도 못하는 당사자는 타들어 가는 사람 속도 모르고, 자기 다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바보처럼 웃기만 한다.
.......리사나, 이럴 때는 화내도 괜찮겠지?
 
"지금이 웃을 때냐, 앙?!"
"죄, 죄송합니다.!"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미라젠의 옛날 성격에 그제야 반성하는 라이는 버릇처럼 머리를 긁으려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정말 미안해 미라젠."
"......알면 됐어."

라이의 진심 어린 사과에 미라젠은 화를 가라앉히고 침대 옆의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그래도 아직 화가 안 풀렸는지 라이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미라젠을 보며 라이는 지레짐작으로 생각했다. 아마 거기에 화내고 있는 거겠지.

"정말 미안...."
"알면 됐대도."
"건물 무너트린 거...."

이 녀석, 뭐라는 거야?
미라젠은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발끈했다.

"그게 아니야 바보!."
"어, 아니야?"

왜 그러지? 건물 무너트린 거 때문이 아닌가? 아, 하긴 이건 마스터가 한숨을 쉬는 부분이던가.
그럼 그 외에 화낼 게 있던가?

"아야, 아야."
"정말이지, 이 멍청이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 때리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바보!"

분노에 새빨개진 얼굴로 라이의 이마를 탁탁 치는 미라젠과 움직이지도 못해 막지 못하는 라이.

이 역시, 어느 한 페어리 테일 소속 마도사의 사소한 이야기 일 뿐이다.